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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3 (토)

[서진한 설교] "영원한 조율, 일상의 조율"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 (press@cdaily.co.kr)

입력 2019. 01. 08 07:28  |  수정 2019. 01. 08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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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일과: 사무엘상 1:4-20, 히브리서 10:11-14, 마가복음 13:1-8

서진한 목사(대한기독교서회 사장, 기독교사상 발행인 및 편집인)
서진한 목사(대한기독교서회 사장, 기독교사상 발행인 및 편집인)

환난과 파괴

오늘 본문 세 개를 연결하기가 간단치 않아 보입니다. 우선 마가복음의 본문은 ‘종말의 때’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이 얼마나 크고 웅장한지 이야기를 하자, 스승 예수께서는 그 제자가 무색하게 즉각 ‘판을 깨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라며, 예루살렘 성전의 완전한 파괴, 철저한 폐허를 말합니다. 제자들은 입을 다물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성전 파괴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고,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을 겁니다. 성전 파괴는 큰 건물 하나가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거룩한 것의 파괴입니다. 그것은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세계의 붕괴요, 현 질서, 현 체제, 곧 신앙적, 사회적 체제의 대 붕괴입니다. 유대인에게는 그것은 말 그대로 대환난입니다.

올리브 산 쪽으로 갈 때, 제자들이 스승에게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환난의 징조를 알려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세주라고 나서서 사람들을 홀릴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터질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과 전쟁이 터졌다는 끔찍한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올 것이다. 나라와 나라가 대적하고, 민족과 민족이 대결할 것이다. 곳곳에 지진이 일어날 것이고, 기근이 만연할 것이다.

이는 고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통과 환난의 총체적 상징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처참한 재난조차도 단지 진통의 시작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환난이 얼마나 큰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래로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19~20절) 하나님께서 고통의 날을 줄여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24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 환난이 지난 뒤에, 그날에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을 것이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다.” 대환난이 지난 뒤에는 기존의 하늘의 힘과 질서, 그 세력들조차 다 붕괴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땅과 하늘 모두의 대붕괴입니다.

오늘 읽은 히브리서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제사를 언급하는데, 모든 제사가 ‘속죄’만을 위한 것은 아니지만, 히브리서는 속죄에 국한해서 제사에 대해 말합니다. 지금까지 제사장들은 죄를 없이 하기 위해서, 제사 드리기를 반복해야 했습니다. 죄를 짓고, 그 죄를 속하기 위해 제사를 드리고, 또 죄를 짓고 제사를 드리는, 이른바 죄와 속죄제사의 무한반복입니다. 이것은 기존 제의 체계이자, 제의적 관계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 순환고리를 끊어버리셨다고 합니다. 그분은 단 한번의 “영원히 유효한 제사”를 드림으로써 더는 제사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14절에서는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을 단 한 번의 희생제사로 영원히 완전하게 하셨습니다.”라고 합니다. 기존의 모든 제의적 관계, 기존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모두 끝나게 됩니다. 기존 질서의 파괴입니다. 새로운 관계, 새로운 질서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관계의 뒤집힘

오늘 시편 대신 교독한 사무엘상의 본문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신탁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데, 이 기도 역시 사회적 관계의 전복(顚覆), 뒤집힘을 노래합니다. 힘센 사람은 꺾어지고, 약한 사람은 강해집니다. 부유했던 자들은 품을 팔게 되고, 굶주리던 자들은 다시는 굶주리지 않을 것입니다. 자식 못 낳던 여인은 자식을 일곱이나 낳지만, 아들 많이 둔 여인은 홀로 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 궁핍한 자를 티끌과 거름더미에서 일으키고 들어올려서, 귀한 자들과 함께 앉게 하시고, 영광스런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고 노래합니다. 그야말로 기존 관계와 질서의 전복입니다.

사무엘상에 나타나는 엘가나의 아내 한나는 서러운 여인의 전형입니다. 옛날에는 재산이라는 것이 남자에게서 남자에게로 전수되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남편에게로, 남편에게서 아들로 전수되는 시절에, 여자는 무력했습니다. 여자가 힘을 갖는 유일한 방법은 자식을 낳는 것, 그 중에서도 아들을 낳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재산이자 권력이었고, 자식을 많이 낳는 게 곧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나는 아들은커녕 아예 자식이 없었습니다. 남편 엘가나는 한나를 사랑하였으므로, 자신이 열 자식보다 더 잘 하지 않느냐고 위로하지만, 그런 처지에 있는 여인에게는 고마운 남편의 사랑도 온전한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한나에게는 자식을 여럿 낳은 강력한 맞수가 있었습니다. 남편의 또 다른 아내 브닌나입니다. 성서는 한나의 “적수 브닌나”라고 하며, 브닌나가 한나를 “괴롭히고 업신여겼다.”고 전합니다.

브닌나는 매년 “주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한나의 마음을 그렇게 늘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한나는 울기만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무엘상 2장에 기록된 한나의 기도 중, “자식 못 낳던 여인은 아들을 일곱이나 낳는다.”는 구절에는 한나의 서러움이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한나가 성전에 가서 “괴로워서 흐느껴 울면서” 입을 달싹거리고 기도하는데, 그것을 본 엘리 제사장이 술 취한 줄 알고 꾸짖습니다. 한나가 대답합니다. 자신은 술취한 게 아니라고. “다만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서, 저의 마음을 주님 앞에 쏟아놓았을 뿐”이라고 말합니다.(15절) “너무나도 원통하고 괴로워서” 이처럼 기도한다고 말합니다.(16절) 한나의 고통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한나는 집에 돌아가서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야말로 인생역전(人生逆轉)입니다. 모든 관계가 달라집니다. 한나는 아들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짓습니다. 그리고 젖을 뗀 뒤에 엘리 제사장에게 데려가 맡깁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 모두는 현재 체제, 기존 관계의 뒤바뀜, 질적 전환, 혹은 파괴를 가리킵니다. 기존 질서가 파국을 맞고 종말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현존 질서와 관계가 파국을 맞는 것, 기존 역사가 종말에 이르는 것에 관한 논의를 신학적으로는 ‘종말론’이라고 합니다.

종말은 목적이 아니다

종말론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주요 주제이면서, 한편으로는 큰 걸림돌처럼 되기도 합니다. 편협한 보수주의 신앙을 가진 분들은 종말론을 문자적으로 독해하여, 신자들을 종말, 곧 심판의 공포 아래로 몰아넣습니다. 심판, 지옥, 꺼지지 않는 불, 처참한 형벌 등이 강조됩니다. 종말 이후에 심판이 있을 것이고, 내 삶은 저울대 위에 달려 평가받게 될 것이라는 공포가 현재의 삶을 옥죄입니다. 그래서 현재는 미래에 볼모 잡힙니다.

이에 반해,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종말론에 대한 언급 자체를 꺼립니다. 성서에서 곧 오리라고 한 종말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오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종말의 지연’입니다. 처음교회는 종말이 임박했다고, 시쳇말로 코앞에 와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바울만 해도 종말이 조만간에 올 줄 알았습니다. 종말이 가까우니,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아예 결혼하지 않은 채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이 ‘종말의 지연’은 교회의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베드로후서는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고 합니다.(3장 8절) 하나님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시간으로 하나님의 종말이 지연된다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오래 참으시는 것은 구원을 위한 것임을 알라고 합니다.(3장 15절) 종말 지연에 대한 교회의 고민과 성찰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한편으로 과학적 사고로 무장한 현대인들은 신화적 언어로 채색된 ‘종말’을 쉬 납득하기 어려워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주 과학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발달하고, 화성에서 물과 생명의 흔적을 찾고, 인간의 이주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대입니다. 이것이 종말에 관해서 말하기를 기피하는 또 다른 이유일 것입니다.

그런데 ‘종말’에 대해서 한 가지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종말은 끝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종말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종말의 목적은 온전한 세계,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말의 목적입니다. 종말 곧 기존 세계와 질서, 권력의 붕괴, 극심한 환난 등은 거기에 이르는 급격한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종말, 이 세계의 종말, 우주의 종말이 파괴와 허무로 끝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성서의 말씀이고 우리의 믿음입니다.

마가복음서의 본문은 해, 달, 별, 하늘의 세력이 붕괴된 뒤에, ‘인자’가 선택한 사람들을 다 모을 것이라 합니다.(27절) 요한계시록도 종말의 환난 이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거기는 더는 눈물이 없는 곳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눈물을 닦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관계의 조율

우리는 예수의 말씀처럼, 그 종말의 시간을 알 수 없습니다. 성서는 천사들조차도 종말의 시간을 모른다고 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또한 그 종말의 모양도, 진행방식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종말은 ‘관계’의 완전한 회복, 또는 ‘관계’의 완전한 재조정을 겨냥한다는 것입니다.

종말의 목적을 ‘관계’라는 말로 단순화하는 것은, 체제, 질서, 권력 등이 다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체제, 질서, 권력은 관계 위에 세워지고, 관계를 엮어 자기를 실현합니다. 예를 들어 권력이란 구체적으로는 권력관계입니다. 집단이 크든 작든, 거기 속한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를 엮어내는 과정에서 권력이 발생하고, 그 권력을 쥔 사람과 쥐지 않은 사람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니 종말의 목적은 ‘관계’를 회복하는 것, 재조정하는 것입니다. 창조의 처음 관계 곧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음악에서는 악기를 처음 상태, 온전한 상태로 회복하는 것을 ‘조율’(調律)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피아노의 음이 흔들리면, 전문가를 불러 조율합니다. 이것은 단지 기계를 조이는 일이 아닙니다. 조율은 음과 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도’와 ‘레’ 사이의 뒤틀린 관계를 조율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한영애라는 가수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조율”이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랫말은 이렇습니다.

알고 있지 꽃들은, 따뜻한 오월이면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철새들은, 가을하늘 때가 되면 날아가야 한다는 것을.
문제, 무엇이 문제인가? 가는 곳도 모르면서 그저 달리고만 있었던 거야.
지고지순했던 우리네 마음이 언제부터 진실을 외면해 왔었는지.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 번 해주세요.
정다웠던 시냇물이 검게 검게 바다로 가고
드높았던 파란하늘 뿌옇게 뿌옇게 보이질 않으니
마지막 가꾸었던 우리의 사랑도
그렇게 끝이 나는 건 아닌지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 번 해 주세요.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 번 해주세요.

미움이 사랑으로, 분노는 용서로
고립은 위로로, 충동이 인내로
모두 함께 손잡는다면 서성대는 외로운 그림자들
편안한 마음 서로 나눌 수 있을 텐데.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번 해 주세요.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 번 해주세요.

“하늘님”께 뒤틀린 세상, 뒤틀린 관계를 방치하지 말고, 이제 처음처럼, 본래적으로 조율해 달라고 요청하는 노래입니다. 대중가요의 가사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일상의 조율

그런데 말입니다. ‘종말’의 목적이 관계의 조율이라면, 우리는 곧바로 그것은 멀고 낯선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특별한 날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계회복이 어떤 모양일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 영원한 조율이 일어날 시기도, 그 내용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평범한 날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평범한 날들의 관계, 곧 일상의 관계를 조율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떻게 조율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우주적 종말은 우리 삶에 멀고 낯섭니다. 그러나 내가 내 삶의 일상, 평범한 하루 속에서 관계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조율하고 있다면, 종말은 바로 지금 여기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 삶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평화상의 상금을 받고, ‘이 돈으로 빵을 얼마나 살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는 일화도 회자됩니다. 그녀는 시상식에 인도 여자들이 흔히 입는 흰색 사리를 입고 샌들을 신고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흰색 사리는 인도의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여인들이 입는 옷입니다.

그런데 취재하던 기자 한 사람이 테레사 수녀에게 물었습니다. ‘세계 평화를 위해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테레사는 ‘집에 돌아가 가족들을 사랑하세요. 평화는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라고 했다지요. 가족 중심주의나 가족 이기주의에 빠지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멀리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더 힘들다고 본 모양입니다. 또한 그녀의 말은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먼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겠느냐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 그래서 체면도 절차도 없이 불쑥 짜증을 내곤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돌아볼 일입니다.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를 조율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내와의 관계, 남편과의 관계, 자녀와 부모의 관계는 늘 사랑의 관계만은 아닙니다. 살펴보면 이 근원적 관계들은 종종 뒤틀립니다. 그래서 그 관계는 상처 입고, 서러운 것이 됩니다.

그 기본적 관계로부터 받는 상처와 서러움은 그 어느 데서 받는 것보다 더 큽니다. 그 근원적 관계는 가장 따뜻해야 하지만, 거기에 더 깊은 상처가 있는 것, 그게 우리네 사람의 삶입니다. 이런 문제제기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제부터라도 그 가까운 관계를 한번 제대로 조율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피차 서로의 서러움과 오래된 원망을 감싸 안아 풀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구약 본문에서 한나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아들을 출산함으로써 그녀의 설움은 끝났습니다. 한나는 이제 그 아들을 힘의 기반, 권력의 기반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젖을 뗀 뒤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물론 서약한 것도 있지만, 그토록 울며 고대하다 낳은 아들에 대해 어찌 집착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한을 풀어준, 그리고 풀어줄 이 아들이 자기의 기반, 자기의 소유가 아님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은, 한나는 단지 자기를 핍박하던 브닌나와의 관계를 뒤집는 데 머물지 않고, 새로운 관계로 나아갔으리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위대한 역사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무엘이 어미 한나의 힘의 기반이었다면, 성서가 말하는 사무엘은 없었을 것입니다.

‘관계의 조율’이란 단지 관계구조를 뒤집는 데에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을 넘어섭니다. 이렇게 넘어서지 않으면, 핍박하는 자는 핍박당하는 자에게 묶이고, 핍박당하는 자는 핍박하는 자에게 묶여 있게 됩니다. 핍박하는 자는 오만과 횡포로 비인간화되고, 핍박당하는 자는 분노와 한으로 스스로를 소진하게 됩니다.

관계방식을 뒤집고 새로이 조율해 보는 것, 관계방식을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평화, 샬롬에 맞게 조율해 나가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지금의 이 일상에서 종말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일상의 종말입니다.

* 위 설교문은 2018년 11월 20일 ‘함께하는 예배 공동체’에서 한 설교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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