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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8 (월)

[박만규 설교] "주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합니까?"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 (press@cdaily.co.kr)

입력 2019. 02. 11 17:27  |  수정 2019. 02. 11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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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6:1-8, 고전 15:1-11, 눅 5:1-11

대한기독교서회 상무 박만규 목사
대한기독교서회 전무 박만규 목사

막 1:4-16-20, 마 4:18-22에서는 예수가 베드로 및 처음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야기가 별다른 부수적인 이야기가 없이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가를 예수가 지나가시다가 "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라고 말씀을 하고, 두 어부형제들은 일어나서 예수를 따르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누가에서는 이야기가 상당히 다르고 복잡합니다. 베드로 및 어부형제들이 예수의 부심을 받고 예수의 제자가 되는 과정을 쉽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마가와 마태는 처음 만난예수의 부름에 즉각적으로 응하는 것으로 기록되어있는 반하여 누가는 시몬의 장모가 예수에 의해 이적적으로 고침을 받은 것을 알고(4:38-39)있었고, 시몬과 그의 형제 야고보 요한이 무리들에게 예수의 설교를 목격(5:1-3)합니다. 누가의 이야기에서는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따라 이적적으로 많은 고기를 잡는 것이 특징이기도 합니다.

본문의 상황은 갈릴리의 작은 어촌입니다. 이 작은 어촌에는 아침부터 부산스럽기만 합니다. 아침햇살에 그물들이 반짝이고 비릿한 내음이 풍기고, 사람들이 여기저기 떼를 지어 서있는 모습입니다. 예수가 바닷가에 서계시고, 사람들이 예수를 향해 물밀 듯이 몰려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 개의 장면을 번갈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는 무리가 몰려와서 말씀을 듣는 장면이고, 하나는 예수께서 해변에 서서 정박된 배를 바라보시는 장면이고, 하나는 어부들이 그 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는 장면입니다. 마치 한편의 수채화를 상상하게 하는 이 세 개의 장면은 한편으로는 전혀 별개인 듯 느껴지고, 한편으로는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합니다. 조금 비약해 보면, 밤새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어부들의 입장에서는 아침부터 남의 일터에 몰려와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참 팔자 좋은 사람들이라고 여겨지고 그래서 심사가 꼬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의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들은 지금 그물을 다 씻어놔야 밤에 다시 고기잡이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배에 오르신 것은 그들의 바쁜 일손을 방해하신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배를 육지로부터 조금 떼어 놓으라'고 하시고 배에 앉으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는 시몬의 배만을 자신의 가르침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베드로 자신을 자신의 가르침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밤새 그물질을 하였으나 소득이 없는 그들에게는 정말 짜증날 것 같은 아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시몬은 의외로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밤이 새도록 수고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의 실존이기도 합니다. 온밤을 통하여 수고하고 애쓰지만 우리에게 남은 것은 빈손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는 이러한 인간의 실존에 다가 오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으로 채우시고 다시 실패의 현장으로 파송하십니다.

시몬은 실패의 현장, 수고의 현장으로 다시 그물을 내리기 위해 나아갑니다, 이로서 책임의 문제는 시몬의 어깨에서 예수의 어깨로 넘어갑니다. 시몬 자신의 생각에 따라 인생의 수고를 다했을 때는 실패도 성공도 시몬의 몫이었으나, 이제 예수의 말씀에 따라 하는 모든 수고의 결과는 예수의 어깨위에 놓여 졌습니다.

" 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다."(6) 이때 시몬의 내면을 요동치게 했던 그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이때 시몬이 예수님 앞에 엎드렸다고 설명합니다. 고기가 많이 잡혔다고 춤출 생각도,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일 생각도 없어 보입니다. 혼자 그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어 사람들을 불러서 그물을 끌어올립니다. 이때 시몬의 마음이 어땠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 것인가? 그의 마음은 온통 두려움과 경외감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많이 잡힌 고기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현존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기적의 문제가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권능이 호숫가에 잇는 사람들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예수의 말씀으로 행하여졌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전적인 권능과 주권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8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이것은 본문의 절정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얼마만큼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각성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선생이라는 호칭에서 주님이라는 호칭으로 예수를 바꾸어 부릅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희랍어로는 '키리에, kyrie'인데 죄를 고백할 때 사용하는 부름입니다. 가톨릭의 '미사 통상문' 처음 부분에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부를 때 이 단어를 씁니다. 베드로는 제자로 부름을 받기 전에 권능과 이적을 통해 거룩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서서 자신의 죄된 모습을 깨닳는 것이 소명의 첫 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이적을 통해 누가는 이 고백하는 장면은 다른 제자들이 예수의 제자로 부름을 받기 전에 이미 예수 앞에 죄를 고백하는 일종의 신앙고백이 있었음을 강조합니다, 예수의 부름은 이러한 고백이 있은 후에 주어졌습니다. 그러한 고백없이 예수의 부름을 받고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누가의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이제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전까지의 베드로의 삶은 새로운 질로 도약합니다. 물고기를 잡는 삶에서 사람들을 사로잡는 삶으로 달라집니다.

복음서에서 맨 처음 베드로가 "고기를 낚는" 어부로서 예수의 말씀에 따라 수많은 고기를 잡는 이야기를 소개한 다음, 다시 사도행전 서두에서 베드로가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3천명의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내용을 소개함으로서, 누가는 갈릴리 호수에서 베드로가 이적적으로 많은 고기를 잡은 이야기 나중에 그가 더 넓은 세계에서 복음을 위해 많은 영혼을 얻은 이야기와 일치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고 말함으로서 누가공동체는 이전의 것을 모두 버리는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사람만이 예수의 제자라고 선언합니다.

구약의 본문에서는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차 있었다. 2 그분 위로는 스랍들이 서 있었는데, 스랍들은 저마다 날개를 여섯 가지고 있었다.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둘로는 날고 있었다. 3 그리고 그들은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화답하였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다." 4 우렁차게 부르는 이 노랫소리에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고, 성전에는 연기가 가득 찼다.

6:1-7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운명과 관련하여 심사숙고에 몰입해 있는 하나님의 어전회의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자로서 이때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어찌 인간의 상상력으로 이 순간을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이 한 번의 경험이 다른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생애를 가르는 결정적인 분기점이 됩니다.

1절의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는 표현은 이사야가 소명을 받았던 역사적 시점을 제시합니다. 웃시야 왕은 반세기 이상(794-742 BC, 52년간)의 재위를 통하여 유례없는 유다의 번영을 이룬 강력한 왕이었습니다. 앗수루와 애굽의 힘이 약해지던 주전 794에서 그가 죽던 742년까지의 긴 통치기간 동안에 국방, 경제(농업, 국제무역), 정치면에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일대에 유대의 영향력을 크게 확장시킨 왕 이었습니다. 그는 에시온게벨이라는 항구를 장악하고 국제무역에 뛰어들어서 많은 사치품을 수입하였습니다.(3:17-4:1) 유다의 산간지를 개간해서 농업을 장려하였고(대하 26:10), 블레셋지역을 장악하였고, 주전 740년경에는 남부 시리아와 동맹을 맺어서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과 충돌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듯 강력한 왕이었던 웃시아와의 죽음은 유다의 정치경제적 위세와 국운의 융성에 크게 고무되어 있던 백성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고, 상실이었습니다. 웃시아의 죽음 앞에서 국운의 몰락과 쇠퇴를 염려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1절을 다시 읽으면, " 강력한 왕 웃시아가 죽은 바로 그해, 나는 높이 들린 보좌위에 앉아계신 신적인 왕 야웨 하나님을 목격하였다"라고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제 왕실의 의존적인 서기관에서 벗어나 천상의 어전회의를 주재하시는 신적 왕의 예언자 시좌(視座)를 획득합니다. 인간 왕의 치적과 화려한 정치적인 위세에 고양되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묵시적 지평이 인간 왕이 죽었을 때 비로소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주적 보좌의 시좌에서 유다와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았을 때, 이사야는 웃시아의 번영 속에서 계약 공동체의 붕괴를 보았고, 그 과정에서 양상된 사회적 약자(고아와 과부)의 울부짖음을 비로소 듣게 됩니다.(1:17, 23, 5:7)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의해서 지탱되던 이스라엘의 기초적인 사회조직은 수출농업을 꿈꾸는 거대란 지주경영자들의 출연을 초래하였고, 이들이 가져온 번영과 국부의 증가는 상대적으로 사회경제적 약자에 대한 계약공동체적 우애를 파괴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정성들여 가꾸어 오신 포도원이 망가진 것이었습니다,(3:14-15, 5:1-7)

5 나는 부르짖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만왕의 왕 야웨 하나님의 영광의 발현 앞에 서있는 이사야의 반응은, 성전 문지방의 진동에 조응하는 영적인 진동입니다. 이사야는 현실을 바라보는 자신의 기존의 관점이 부서지는 진동을 경험합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라는 표현은 죄악된 삶 한가운데로 돌파해 오신 하나님의 영광에 대면하는 사람들이 터트렸던 엣 자아의 죽음을 확증하는 절규이기도합니다.(눅 5:8, 행 9:3-9) 이사야는 높이 들린 보좌위에 앉아계신 야웨 하나님을 보고 야웨의 거룩하심을 찬양하는 스랍들의 거룩 삼창을 듣고, 성전 문지방의 진동을 목격하고, 마침내 지울 수 없는 영혼의 지진을 경험합니다.

이사야는 자신이 죽었다고 선언한 이유를 제시합니다. 이는 입술이 부정한 자이면서 동시에 입술이 부정한 백성들 중에 거하는 자신이 만군의 하나님과 마주쳤기 때문에 죽음을 경험했다고 선언합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죄악과 자신이 살고 있는 공동체의 죄악을 모두 고백합니다. 자신이 속한 사회의 부정한 언어들과 생각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자신을 인정합니다.

절망적인 죽음의 선언 앞에서 엎드러진 이사야에게 스랍이 날아와서 극적인 죄 사함을(출 19:12, 18, 21) 선포합니다. 제단에서 타고 있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서, 7 그것을 나의 입에 대며 말하였다.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 여기에서 입은 인간존재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대언자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신체의 중심적인 기관입니다. 이는 이사야의 속량 사건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자로서의 품격을 획득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8 그 때에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내가 아뢰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이제 이사야는 하나님이 주재하시는 천상의 어전회의로 인도됩니다. 심각하고 중대한 내용이 이제 막 이루어진 듯합니다. 이제 남은 일은 이 중차대한 하나님의 결정을 백성들에게 전달할 메신저를 찾는 일입니다. 이사야 자신은 어떠한 내용이 결정되었는지는 통보받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주재하시는 어전회의에서 이미 결정된 사항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전령을 찾는 하나님의 심사숙고의 현장에 참여하여 메신저의 역할을 자원합니다. 이사야의 이러한 전향적인 태도는 결국 하나님께서 죄를 속량하심에 대한 응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사야의 자원적인 자세를 그대로 받으시고 곧장 이사야의 예언자적 과업을 진술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뒤에 이어지는 9-13절에 이사야가 미처 듣지 못한 하나님의 결정사항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어전회의의 토의와 결정사항은 이 백성은 운명에 관한 내용입니다.

9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너희가 듣기는 늘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못한다. 너희가 보기는 늘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못한다' 하고 일러라

이 백성은 1-5장에 등장하는 '백성'은 깨닳지 못하는 백성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는 백성이요(1:2-3),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를 깨뜨리는 자요, 하나님의 정하신 공의와 正邪(정사)眞僞(진위)의 기준을 뒤엎는 백성이다.(5:8-24) 5:11-24에는 아침부터 포도주에 취하여 연희에 빠진 지배계층을 소개합니다. 이들은 "너희가,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 나가, 땅 한가운데서 홀로 살려고 하는 자들"(5:8)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웃시야 이후에 형성된 지주계급과 대규모 수출을 주도했던 지주형 농업경영자들의 토지겸병과 독점을 정죄합니다. 웃시야, 요담왕때는 농업생산물이 대부분 수출을 하고 대신 왕실의 사치품과 군수물자가 수입되었습니다. 이런 자신만만한 상황에서 독주와 포도주에 취한 지배계급과 상류층 사람들의 영적 감수성은 완전히 도태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술 취한 백성은 "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거문고와 소구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주님께서 손수 이루시는 일도 거들떠보지를 않는다." (5:12) 결국 이 백성은 동시대의 역사 속에 작용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무신론적 세계관을 갖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백성의 장래와 관련한 중차대한 결정을 내리시고 이사야에게 그 내용을 전달하도록 위임하십니다.

'너희가 듣기는 늘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못한다. 너희가 보기는 늘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못한다.' 이 같은 책망과 위협의 말씀을 전해야하는데, 도데체 무엇을 깨닫지 못하고 무엇을 알지 못한단 말입니까?

"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저를 어떻게 먹여 키우는지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 (1:3) 그들과 하나님의 관계입니다. 결국 이사야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자신의 방식대로-안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분쇄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즉, 홍수처럼 밀려오는 앗수르의 위협 속에서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위기의 근본은 앗수르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죄악, 곧 공의와 정의의 파괴라고 보았습니다. 공의와 정의를 파괴하는 공동체가 받는 가장 가혹한 징벌중의 하나는 영적인 인지능력의 붕괴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유다의 지도자에게 앗수르라는 거대제국과의 민족주의적 충돌을 감행하기보다는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과부와 고아의 재판을 공평하게 하고 피곤한 자에게 쉼을 베푸는 정책을 권고하였습니다. 공동체내에서 가장연약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해소책이라고 권고합니다. 이사야가 유다왕실에게 애굽의 군마와 병기를 사드릴려고 막대한 돈을 낭비하고(30:6-8), 외국들(39:1-6 바빌론과 애굽 30:1-17)과 군사동맹을 맺어 앗수르와 대항하는데 골돌하지 말고 공동체 내의 가장연약한 자를 돌보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군사주의적 정책(다윗제국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유다왕궁내의 반앗수르 정치가들은 이사야의 정치신학적인 충고를 유치한 어린아이들의 이야기라고 배척합니다.(28:14-22, 30:8-11, 15-17)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 영적인 교통이 망가지면, 하나님의 언어는 낯선 언어로 들립니다. (33:19) 그래서 이사야의 청중들은 깨닳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백성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간극 때문에 이사야는 알아들을 수 없는 메시지를 전하는 예언자로 배척을 받습니다.(28:11) 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추방과 고립, 따돌림을 당하는 존재가 됩니다.

결국, 주전 705년부터 팔레스타인 일대의 반앗수르 봉기를 주도하면서 앗수르제국과 전쟁을 벌이려던 유다왕실은 주전 701년에 "앗수르의 위기"라고 불리는 산헤립의 유다침입을 초래합니다. 예루살렘을 제외하고는 온 나라 전체가 산헤립에게 유린과 약탈을 당하였습니다. 나라의 몸통전체가 잘리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앗수르제국과 군사적으로 맞서는 동안에 국력은 국력대로 소진되어 나라전체가 파멸의 직전까지 내몰리게 된 것입니다. 이 위기의 한복판에서 이사야의 예언이 갖는 무게감은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앗수르를 하나님의 심판의 대행자로 간주 하였던 이사야의 신학적인 주장이 사회분석이나 현실인식능력에서 열등하지 않았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신서의 사도 바울의 고백을 봅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것을 고린도교회에 전해주었음을 언급합니다. 그 내용은 그리스도가 죽었다. 장사되었다. 부활했다. 그리고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자기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게바에게 먼저 보이십니다. 그 다음 열두 제자에게 보이십니다. 그리고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메섹에서 바울에게 보이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9:4) 이때 바울은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9:5) 여기에서 사울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그는 바울로 변화됩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정직한 대면일 것입니다. 그분 앞에서 나의 자아가 무너져 내릴 때 비로소 나에게도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하나님은 어떤 모습입니까? 우리는 영혼을 뒤흔드는 거룩한 임재를 삶가운데 경험하고 있습니까? 라고 성서는 묻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죄인임을 자각할 수 없어 보입니다. 또한 죄인으로서의 각성이 없다면 제자로서의 소명도 존재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주님의 부르심에 직면하고 있는가? 부르심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있는가?를 묻는다면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경험하기에는 비순종적으로 보입니다. 성장논리로 중무장 되어서 하나님의 기적적 권능이 비집고 들어갈 어떠한 틈도 없어 보입니다. 여기저기 고기를 낚는 방법들을 모색하는 세미나는 많이 열리지만 깊은 물에 그믈을 내리라는 주의 음성에는 순종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오직 교회의 성장을 위해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신소재를 목마르게 찾아 헤메고 있습니다. 유행처럼 성장 프로그램이 교회를 휩쓸고 지나갑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 서지 않으려 하고, 결코 죄인의 자리에 내려가려고 하지도 않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저는 지난 금요일/8일 오후 4:21분에 NCCK 인권센터에세 보내준 문자를 받았습니다 2018년 12월 11일 충남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숨진 故 김용균 노동자 시민장례위원을 모집을 오후 6시까지 마감을 하고, 회비 1만원을 내야한다는 내용입니다. 저도 우리가족 모두가 참여할까? 아니면 저 혼자라도 참여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수신된 문자를 자세히 보니, 계좌번호는 있는데 은행이름이 없음을 발견하고는 난감해 하다가, 하루의 업무를 마감하기 위한 직원들의 내방이 많아서 그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어제 광화문광장에서는 고인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영결식 자리에 도착해서 연신 눈물을 흘리며 비통해하다가 단상에 올라 "내 아들아 너를 보내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하구나" 라며 오열했다는 기사를 접하고는 저도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우리민족의 미래를 좌우할 수도 있는 제 2차 북미정상회담이 2/27-28일 하노이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인 평화체제구축을 위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조치들이 합의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더불어서 오늘 이사야가 권고하는 대로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과부와 고아의 재판을 공평하게 하고, 피곤한 자에게 쉼을, 공동체내에서 가장연약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들에 우리가 관심을 더 할 때에 이 땅에서의 평화를 더욱 공고하게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설교는 지난 2019년 2월 11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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