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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4 (수)

[박만규 설교]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 (press@cdaily.co.kr)

입력 2018. 11. 05 03:40  |  수정 2018. 11. 05 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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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일과: 욥 42:1-6, 10-17, 히 7:23-27, 막 10:46-52

대한기독교서회 상무 박만규 목사
대한기독교서회 상무 박만규 목사

오늘의 성서일과 복음서는 여리고에서 일어난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디매오가 등장한 여리고는 낮은 지대에 위치한 아열대성 기후를 지닌 매우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그래서 '안토니우스'는 그 아름다운 도시를 '클레오파트라'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바디매오가 살던 당시에도 여리고는 번창했고, 향기로운 도시라 할 만큼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이 아름다운 도시의 청명하고 아름다운 날 어느 아침에 거지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아마도 눈먼 거지였던 바디매오는 다른 사람의 연민으로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런 바디매오가 이 날 아침 예수님을 만나면서 멀었던 눈을 뜨게 됩니다.

예수께서 장님인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해주십니다.

이 날 아침 눈먼 거지는 나사렛 사람 예수가 지나가고 있다는 소리를 들게 됩니다. 그래서 크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막 10:47) 하고 외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은 것은 당시 상황을 말해 줍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정치적 메시아, 곧 이스라엘을 다시 재건할 정치적 메시아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바디매오'의 울부짖음은 일반적 정치적 메시아 관념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무리들은 눈먼 거지 '바디매오'를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기록한 마가의 의도는 맹인이었던 '바디매오'의 입을 통해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하고 예수를 호칭케 함으로써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생각하는 한 누구나 다 맹인'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것은 예수가 어떤 분인지 깨닫지 못하는 한, 예수를 따르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길 가던 예수는 발걸음을 멈추고, '바디매오'에게 다가오라고 합니다.

거지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예수께 다가갑니다.(막 10:50) 그로부터 그의 삶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도약합니다. 맹인으로서 거지로서의 삶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전에 야고보와 요한으로 부터도 부탁을 들은 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높은 자의 자리에 오르시지만, 야고보와 요한은 중요한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청탁을 합니다. 성경은 이 말을 들은 다른 열 제자가 분개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막 10:35-17)

오늘 마가의 기록은 예수를 따르고자 했던 제자들의 믿음도 겨우 이정도 였다는 것을 바디매오의 이야기로 드러내주는 듯합니다.

36절에서 예수는 두 제자에게 내가 너에게 무얼 해주길 원하느냐고 물었던 것처럼 바디매오에게도 똑 같이 질문하십니다. 이 똑같은 질문에 그들은 서로 원하는 것이 달랐습니다.

10장 31절에 나오는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는 말씀이 이런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께 다시 보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가 처음 원하는 건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내가 보기를 원합니다' 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십니다. 너를 구원하는 건 너의 믿음이라고 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 말씀은 예수의 부르심에 응했다는 것 아닐까요?

예수는 1장 15절에 기록된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하시는 총체적인 메시지에 비춰보면, 바디매오가 옷을 버리고 예수께 찾아왔다는 것은 회심을 말합니다.

바디매오는 처음에는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라고 말했지만, 지금은 나를 다시 보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통해서 누구나 보지 못하면 거지로 살 수 밖에 없겠구나. 믿음이 없으면 잘못 구하겠구나 생각이 듭니다.

성경은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합니다. 네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밝다고 합니다. 눈이 삶을 좌지우지 한다고 말합니다. 선생님 제가 다시 보게 해주십시오. 이는 가장 큰 소원이었을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보는 것이고, 보는 것은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를 보고 있지만 어떻게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마가는 믿음은 따르는 것이고, 예수의 뒤를 쫓아서 사는 것인데, 어떻게 그분이 누군지 모르고 살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바디매오의 이야기는 바로 이런 논리로 이해됩니다.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 부른 바디매오를 맹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디매오는 다시 보게 됐고, 그래서 예수의 길을 다시 따랐다고 말합니다.

예수가 변화산에서 내려올 때, 바디매오가 진실을 다시 보게 됐다고 한다면 다시 본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걸 바디매오는 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는 마지막에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2절에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에게 너의 길을 가라고 하셨지만, 바디매오는 예수의 길을 쫓습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다. (막 10:52)

오늘은 바로 종교개혁주일입니다.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보면서, 저도 한 사람의 목사이긴 하지만 나 역시 맹인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믿노라 하면서도 거지의 수준에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두 제자들이 예수의 오른편, 왼편에 앉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나 또한 그런 것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보길 원했고, 다시 눈 뜨임이 일어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10월 28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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