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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0 (목)

[민영진 설교] 하나님의 자비(慈悲), 하나님의 고통(苦痛)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 (press@cdaily.co.kr)

입력 2018. 02. 19 21:30  |  수정 2018. 02. 20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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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9:8-17; 벧전 3:18-22; 막 1:9-15

함께하는예배>공동체 공동설교자
'함께하는예배' 공동체 공동설교자 민영진 박사

사순(四旬) 시기는 재[灰]를 이마에 바르며 죄를 통회하는 기간입니다. 지난 2월 14일 재의 수요일로 시작됩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 전야까지 40일을 사순절기(四旬節期)로 지킵니다. 이 기간 동안 있는 여섯 번의 주일은 세지 않습니다. 즉,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주일 직전 성토요일까지, 주일을 제외하고 날수를 세면 40일 곧 사순이 됩니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다함께 이 기간을 사순절로 지킵니다.

이 기간에 하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는 시간이 들어 있어서 이 기간은 우리가 자숙(自肅)하고 참회(懺悔)하고 자정(自淨)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아드님이 당하시는 고난은 바로 그를 사랑하는 아버지이자 어머니이신 하나님의 고난이기도 합니다. 성부와 성자가 고통을 당할 때 성령은 어떠하셨을 것 같습니까? 성삼위(聖三位) 하나님께서는 삼위(三位)이시면서 동시에 일체(一體)이시니까, 그리고 신학에서는 "성령 하나님의 고난"이 주제가 되어 논의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고난을 성삼위 하나님의 고난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오늘의 성서일과 중 시편의 말씀(시 25:1-10)은 시인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와 한결같은 사랑을 상기시켜드리는 것이 주요 내용입니다.

주님, 먼 옛날부터 변함없이 베푸셨던,

주님의 긍휼하심과 한결 같은 사랑을

기억하여 주십시오.(시 25:6)

시인은 주님께서 "먼 옛날부터 변함없이 베푸셨던" 주님의 "긍휼"(히브리어 '락하밈', compassion, mercies)과 "한결 같은 사랑"(히브리어 '헤쎄드', lovingkindness)을 기억해 주실 것을 빌고 있습니다. "긍휼"과 "사랑"은 구약신학의 주제입니다.

오늘의 성서일과 중 구약 창세기의 말씀(창 9:8-17)은 하나님께서 홍수 이후에 방주에서 구원받은 사람하고만 언약을 맺으시지 않고 짐승과도 계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창 9:10-11)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0 너희와 함께 있는 살아 숨쉬는 모든 생물, 곧 너와 함께 방주에서 나온 새와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에게도, 내가 언약(言約)을 세운다. 11 내가 너희와 언약(言約)을 세울 것이니,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들을 없애는 일이 없을 것이다.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창 9:10-11)

오늘의 성서일과 중 신약 베드로전서의 말씀(벧전 3:18-22)은 예수께서 친히 지옥을 방문하시는 예수(벧전 3:18-22)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셔서 선포하셨습니다"(벧전 3:19).

이 표현은 너무 짧아서 의미 전달에 제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벧전 4:6에서 좀 더 분명하게 진술됩니다.

"죽은 사람들에게도 복음(福音)이 전해진 것은, 그들이 육신으로는 모든 사람이 심판받는 대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새번역 벧전 4:6).

개정판도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라고 하여 같은 이해를 반영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산다"는 말은 아마도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영어 번역 중에서 CEV에서 이런 이해를 볼 수 있습니다.

The good news has even been preached to the dead,

so that after they have been judged for what they have done in this life,

their spirits will live with God.

(CEV 1 P 4:6)

우리나라 교회에서 오랫동안 사용했던 개역은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번역합니다. 아마도 이 말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처럼 그 영들도 살게 한다"는 말로 이해가 됩니다. 영어 번역 TEV에서 이런 이해를 볼 수 있습니다.

That is why the Good News was preached also to the dead,

to those who had been judged in their physical existence

as everyone is judged; it was preached to them so that

in their spiritual existence they may live as God lives.

(TEV 1 P 4:6)

번역들이 표현을 약간씩 달리 하지만 공통된 뜻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근거한 인간 구원의 의지가 지옥까지 미친다고 하는 점입니다. 지옥(地獄)까지 가셔서 복음(福音)을 전하시는 예수에 관해서는 교회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사용해온 사도신경은 "장사(葬事)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고 하여 예수께서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라틴어 원문을 살짝 가리고 있습니다. 새로 개정된 사도신경에서는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라고 고치고, "장사된 지"에 각주를 달아서 <'장사되시어 지옥에 내려가신 지'가 공인된 원문(Forma Recepta)에는 있으나 대다수의 본문에는 없다.>는 설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라틴어 원문 사도신경(CREDO), 영국성공회의 사도신경(Apostle's Creed), 개신교 사도신경(Apostle's Creed) 등에는 "그가 지옥에 내려가셨다"("He descended into hell") 라는 본문이 있습니다. 오늘의 성서일과 베드로전서 3:19이, 그리고 베드로전서 4:6이 바로 사도신경에 나오는 이러한 고백의 성경적 근거 자료입니다.

오늘의 베드로전서 본문에서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세례(洗禮)를 구원(救援)과 부활(復活)에 연결하는 베드로의 재해석(再解釋)입니다.

"세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벧전 3:21)

오늘의 성서일과 중에서 마가복음서의 말씀(막 1:9-15)은 하나님의 수난(受難)이 시작되는 것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물에 잠겼다가 물 위로 올라오시면서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성령께서 내려오시는 것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아드님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입니다.

10 예수께서 물속에서 막 올라오시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聖靈)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11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막 1:10-11)

그런데 성령(聖靈)께서는 우리 주님을 위험한 광야(廣野)로 내보내십니다.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고난을 받으십니다.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소수민족이 함께 사는 복잡한 사회에서 어느 한 민족이 추방을 당하거나 어떤 장소에 유폐되거나 난민집단이 되는 것 같은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1933년, 스탈린이 고려인들을 극동 사할린에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 시킨 것도 민족적 고난의 한 예일 것입니다. 현대의 유럽 난민도 고난 받는 잡단입니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을 졸지에 잃게 될 경우도 그런 사별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됩니다. 술중독이나 마약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들, 상상도 못했던 어려움을 겪으며 지금까지 지켜왔던 믿음을 버릴 위기에 직면하거나 하나님 부재에서 느끼는 철저한 소외감 역시 한 개인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런 고통에서 예외적으로 피할 수 있는 이는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마저 당신의 피조물을 끝내 포기하지 못하고 대신 죄 짐을 지는 고난을 감수하는 것이야 말로 절대자의 절대적 무능입니다.

하나님이 피조물을 향한 자비(慈悲)와 긍휼(矜恤)과 사랑 때문에 스스로 죄 값을 지시는 고난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신학자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으로 묘사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을 향한 당신의 자비, 긍휼, 사랑 때문에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을 포함한 생명을 지닌 모든 피조물을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언약을 맺으십니다. 해일(海溢) 같은 자연 재해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는 신학은 재고되어야 합니다. 지옥에까지 가셔서 거기 갇혀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배려는 오늘 우리가 잊었던 옛 것을 새롭게 발견해야 하는 주제입니다.

김춘수의 시 "요보라의 쑥"

시 한편을 함께 감상하고 싶습니다. 1977년 근역서재에서 나온 김춘수 시인의 시집 '남천'(南天)에 실린 시입니다.

"요보라의 쑥" - 김춘수

너무 달아서 흰빛이 된

해가 지고, 이따금 생각난 듯

골고다 언덕에는 굵은 빗방울이

잿빛이 된 砂土를 적시고 있었다.

예수는 죽어서 밤에

한 사내를 찾아가고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제일 가난한 사내

유월절에 쑥을 파는 사내

요보라를 그가 잠든

겟세마네 뒤쪽

올리브숲 속으로, 못 박혔던 발을 절며

찾아가고 있었다.

---- 안심하라고,

쑥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안심하라고,

겨우 15행밖에 안 되는 이 짧은 시 속에 "빛을 잃은 해", "골고다", "예수의 죽음", "예루살렘 시내", "가난한 사람", "유월절(逾越節)", "겟세마네", "올리브 숲", "못 박혔던 발", "안심하라!"에 이르기까지 십여 개의 성경 용어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용어만이 아닙니다. "유월절 쑥"같은 헤브라이즘이 설명도 없이 그대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아니, 범위를 더 좁혀서 1970년대 김춘수 시인의 독자들 중에, 유태인들의 유월절(逾越節) 식탁 메뉴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그건 고사하고, 유태인들에게 유월절이라는 축제가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1970년대의 그의 독자들 중에 얼마나 있을까요? 기독교인들이라고 해서 다 유태교의 절기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유월절이 유월절(六月節) 쯤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도대체 그는 유태인들이 그들의 이집트 탈출과 해방을 기념하는 유월절에 그들이 이집트의 쓰디쓴 노예 생활을 회상하면서 그것을 잊지 않으려고 인진(茵蔯) 쑥 같은 쓴 나물을 먹는다는 것을 기독교인도 아닌 우리 시인이 또 어떻게 알았을까요?

예수가 죽어서 "지옥으로 내려갔다"는 사도신경(使徒信經) 의 신앙고백은 있어도, 물론 시적 상상이긴 하지만,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제일 간난한 자, 유월절 쑥 장수를 찾아가서 생업(生業) 걱정 하지 말라고, 쑥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안심(安心)시킨다는 시인의 상상은, 성경 본문을 읽고, 암송하고, 주석하고, 해석하고, 설교하고 하는 우리 같은 성서학도들도 잘 못하는 일입니다. 적어도 저는 평생 그렇게 못했는데, 어떻게 그 시인은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그의 시가 시로서 어떤 평가를 받는지는 모릅니다. 저로서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저보다도 그가 더 예수에게 밀접하게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도 아닌 그 시인이 과연 누구인가를 알고 싶은 호기심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시인은, 한 편으로는 목사인 저를, 성서학도인 저를,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저를 늘 부끄럽게 만들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는 그의 시를 통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잘 보지 못하는 역사적 예수의 여러 국면을 볼 수 있게 하고 생각하도록 자극을 줍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시의 제목이 "요보라의 쑥"입니다. 둘 다 낯섭니다. '요보라'라는 이름도 좀 이상합니다. 유대인에게 관심이 있는 분들 중에서도 아마 이런 이름을 지닌 유대인은 처음 만나보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남자 이름인 것을 아는 사람은 더 적을 것이다. 젊은 시절에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의 학생으로 현지에서 5년 동안 살아본 일이 있는 저로서도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요보라'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있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낱말 중에 YBR라는 어근을 가진 말이 있는지도 전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름도 아니고, 히브리어 이름도 아닙니다. 낯선 이름입니다. 시인이 어떤 상상 속에서 지어낸 이름인 것 같습니다.

"쑥"은 또 어떻습니까? 김춘수의 시를 읽다가 늘 이런 것에 놀랍니다. 유대학, 구약학, 헤브라이즘 등을 공부한 이들도 잘 모르는 것을 그가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유월절 쑥"을 두고서 하는 말입니다. 유월절에 유태인들이 밥상에 올리는 필수 나물이 쑥처럼 쓰디쓴 맛을 내는 '므로르'(meror, "쓴 나물")라고 하는 나물입니다. 정확하게는 그것은 식물도본에서 보는 "쑥"이 아니라 "쓴 나물" 일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라아나'(la'anah)라고 하여 "쑥"이라는 말이 따로 있긴 하지만 쓴 것은 쑥이나 유월절 쓴 나물이나 마찬가집니다. 우리 시인이 '므로르'를 쑥이라고 해서 과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쓴 나물"을 일컫는 '므로르'는 "쓰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마르'(mar), 혹은 '마라'(marah)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예수는 죽어서 밤에

한 사내를 찾아가고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제일 가난한 사내

유월절에 쑥을 파는 사내

요보라를 그가 잠든

사도신경의 신앙고백과는 달리 우리 시인은 죽은 예수가 제일 급하게 간 곳이 예루살렘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을 대표하는 요보라가 사는 곳입니다. 김춘수의 예수는 평소 가난한 자에 대해서 보였던 자신의 지극한 관심을, 제일 가난한 자를 찾아가는 것으로 사후에도 그의 관심사에 아무런 변화가 없음을 나타냅니다. 오늘의 성서일과 말씀 명상에 도움을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

주님,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립니다.

우리의 하나님, 우리가 주님께 의지하였으니,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 원수가 우리를 이기어 승전가를 부르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주님, 주님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그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우리가 종일 주님만을 기다립니다.

주님, 먼 옛날부터 변함없이 베푸셨던, 주님의 긍휼하심과

한결 같은 사랑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우리와 함께 있는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물, 곧 새와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도 언약(言約)을 세워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들을 없애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언약하신 하나님, 모든 피조물이 전쟁과 핵무기의 위협과 지진과 해일로, 온갖 교통사고와 화재로, 추방과 배척으로, 아직까지도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성삼위 하나님과 코로 호흡하는 피조물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의 자숙(自肅)이 진실할 수 있도록

우리의 참회(懺悔)가 자기기만이 되지 않도록

우리의 자정(自淨)이 회칠한 무덤이 되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빕니다. 아멘

축도

심판받은 영혼을 구하시려고 지옥에까지 내려가시는 주님의 은혜가,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고난을 함께 지시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를 위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빌어주시는 성령님의 위로가

호흡이 있는 모든 피조물 위에

언제까지나 함께 계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 민영진 박사는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로, 구약 신학학자로서 모두가 인정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성경번역가이다. 연세대신학대학을 거쳐 이스라엘 히브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민 목사는 '표준새번역'과 '새번역' '개역개정판' '공동번역' 등의 성경 개정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2월 18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사순절 첫 주일예배 설교문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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