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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5 (월)

[민영진 설교] "사순절에 생각나는 사람"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 (press@cdaily.co.kr)

입력 2019. 03. 11 10:26  |  수정 2019. 03. 15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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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3:42-43

함께하는예배>공동체 공동설교자
'함께하는예배' 공동체 공동설교자 민영진 박사

평생 성경을 번역하고 개정하고 또 공부하고 읽어 오면서 나 자신이 오랫동안 불편해 했던 본문이 몇 곳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이 그 중 하납니다. 여러분들께서도 궁금해 하실 것 같아 오늘 함께 명상해 보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23:42-43 안에 들어 있는 본문, 곧 예수와 십자가에 달린 도둑과의 대화를 말해주는 본문입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도둑이 주님께 말을 겁니다. "42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자 43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그리스어, '파라데이소스')에 있을 것이다."(눅 23:42-43)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을 받으시던 날 다른 죄수 두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처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눅 23:32). 로마의 군인들은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서,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 형틀에 달고, 다른 두 죄수들도 십자가 형틀에 달았습니다. 한 죄수는 예수의 오른쪽에, 다른 한 죄수는 예수의 왼쪽에 달았습니다. "해골"은 아람어, "골고다"의 번역입니다. 라틴어, "갈보리"는 한국어번역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말입니다. 찬송가에 나오는 "갈보리"는 "골고다"를 뜻하는 라틴어입니다.(눅 23:33).

34절 상반절을 보시면, 이 본문이 <새번역>에서는 겹괄호 [[ ]]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 23:34a) 그러나 <개역>과 <개정>은 괄호 대신에 이 괄호 안 부분이 고대역에는 들어 있지 않음을 각주에서 밝힙니다.

로마 군인들은 "제비를 뽑아서,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습니다(눅 23:34b). 유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비웃으며 말하였습니다. "이 자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그가 택함 받은 자라면, 저나 구원하라지"(눅 23:35) 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로마 군인들, 곧 로마 병정들도 예수를 조롱하였습니다. "36 병정들도 예수를 조롱하였는데, 그들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신 포도주를 들이대면서, 37 말하였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나 구원하여 보아라'"(눅 23:36). 예수의 머리 위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이다" 이렇게 쓴 죄패가 붙어 있었습니다(눅 23:38). 십자고상(十字苦像) 위에 쓰인 INRI는 로마 말, 곧 라틴어 "예수"(IESVS, 예수스)의 머리글자 "I"와 "나사렛 사람"(NAZARENVS, 나자레누스)의 머리글자 "N"과 "왕"(REX, 렉스)의 머리글자 "R"과 "유대인의"(IVDÆORVM, 유대오룸)의 머리글자 "I"를 합쳐서 "INRI"로 적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로마 말로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라는 말입니다

예수와 함께 달려 있는 죄수 가운데 하나도 예수를 모독하며 말하였습니다.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구원해봐라" 민] (눅 23:39). 그러자 다른 한 죄수가 그를 꾸짖으며 말합니다. "우리야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다."(눅 23:40-41)

그러고 나서 동료 죄수를 꾸짖던 그 죄수는 예수께 말합니다.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문자대로는 "당신이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눅 23:42)

가당치 않은 요청입니다. 이 죄수의 요청이 너무 염치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이 죄인의 요청을 놓고 왈가왈부할 시간이 없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하시는 말씀을 한 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이 죄수는 보통 도둑이 아니고 십자가형을 받을 정도의 큰 도둑, 흉악범, 곧 대도인데, 그가 우리 주님을 향해 "예수님, 주님(당신)이 주님(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눅 23:42) 라고 할 때, 저는 그 도둑이 참 염치없는 도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그 주제에 어찌 우리 주님께 감히 주님께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뉘우쳐도 모자라겠거늘 어찌 낙원을 엿본단 말입니까! 우리주님께서 정신이 혼미한 틈을 타서 낙원까지 훔치려하는 도둑이라면 그 도둑 진짜 도둑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더 놀랄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 주님께서 숨이 막 넘어 가려는 그 순간에, 우리 주님께서 이 도둑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당신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눅 23:43). 그리스어 본문을 보니까, 예수께서 그 도둑 죄수에게 어처구니없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멘! 약속하지. 자네는, 오늘 나와 함께 파라다이스에 있게 될 걸세." 이것은 그리스어 본문을 문자대로 번역한 것입니다. 번역들에 따라서는 "아멘!"을 "그래, 내가 약속한다(promise)"로 번역합니다. 더러는 "내가 보증한다(assure, guarantee)"라고도 번역합니다. "I can guarantee this truth: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Luk 23:43 GWN)

저는 그 죄수 도둑이 예수께서 정신이 혼미하신 틈을 타서 예수에게서 낙원 약속을 훔쳐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도둑놈 진짜 도둑놈이지요. 결국 죽어가면서 하나님의 나라 낙원까지 훔쳐냈으니 말입니다. 도둑놈은 도둑놈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예수께서 좀 신중하게 생각하지도 않으시고 그런 자에게 낙원 약속을 그렇게 쉽게, 그리고 그렇게 빨리 할 수 있는가, 아니, 낙원 입국에 보증까지 서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아니, 낙원 입국을 보장까지 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쉽게" 그 죄수의 요구를 들어주셔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한 죄수가 극형으로 처형되면서도 죽는 그 순간에 예수께 간구하여 낙원을 허락 받은 것이 우리의 상식에 많이 거슬립니다. 덩달아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461 "십자가를 질 수 있나"의 2절 "너는 기억하고 있나 구원받은 강도를, 저가 회개하였을 때 낙원 허락받았다."

저는 오랫동안 이 찬송가 부르기도 주저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이 도둑이 자꾸만 생각납니다. 특히 사순절 기간이나 고난주간이 되면, 이 본문을 읽게 되니까, 잊을 만하면 이 도둑이 저에게 자꾸만 다가옵니다. 두 가지 계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거의 25 년 전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연한 기회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Francisco Isidoro Luis Borges, 1899-1986)라고 하는 아르헨티나의 시인이 지은 "누가복음 23장"(LUKE XXIII)이라는 시를 만난 일이고, 다른 하나는 우연한 기회에 종교개혁 이전의 중세교회 역사를 공부한 것입니다.

보르헤스의 작품은 스페인어로 씌어있습니다. 여러 영어 번역들이 나와 있습니다. 제가 우리말로 번역하여 대강 그 내용만 소개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3장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십자가에 달렸던 그 도둑은)
이방인이었을까? 히브리인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평범한 사내였을까?
이젠 세월에 잠겨 잊힌 그의 이름을
누구도 더는 기억해내지 못하리라.
유태인이 십자가에 못박은
한낱 도둑일 뿐인 그도
자비라는 것에 관해서는 좀 알고 있었을까?
(그가 강도라는 것 외에)
그가 살아온 세월에 관해서는
우리는 지금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도둑은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그 마지막 순간에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자기 곁에서 죽어 가는 자가
바로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이 생각나서
도둑은 무턱대고 예수에게 말을 건넨다.
"당신이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나를 기억해주십시오."
장차 온 인류를 심판하실 예수에게서
믿기 어려운 대답이 흘러나온다.
예수께서는 지금 그 끔찍한 십자가에 달려
그 도둑에게 낙원을 보증하신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숨을 거둘 때가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두 사람이 죽은 그 날의 역사는
그 첫 금요일 오후의 기억을
망각 속에 묻어두지 않았다
아, 벗들이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 친구,
그가 그토록 천진난만한 사람이었던가!
어린아이 같은 그 솔직함이라니!
그 천진함, 그 솔직함이 치욕스런 형벌을 받으면서도
그 도둑으로 낙원을 요구하게 했고,
끝내 낙원 약속을 얻어내게 했는가!
이 도둑이 죄를 짓도록 내몰고
기회를 보아 살인까지 하도록
수없이 그를 내몬 것도 바로 이것이었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이 도둑을 "천진난만한" 사람이라고, 어린애 같은 솔직한 심정의 소유자라고, 그렇기 때문에 염치불구하고 예수에게 매달려 낙원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워도 아르헨티나의 그 시인이 누가복음 23장에 나오는 그 죄수 도둑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에 관한 시를 썼다는 것만으로도 저로 하여금 그 도둑을 다시 보도록 이끄는 계기가 된 것만은 분명합니다.

제가 이 도둑에게 관심을 가졌던 두 번째 계기는 우연한 기회에 서양 교회 역사를 살피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23장에 나오는 이 도둑이 "회개한 도둑"(Penitent Thief), 혹은 "십자가 위의 도둑"(the Thief on the Cross), 혹은 "선한 도둑"(Good Thief)이라고 하여 가톨릭에서는 이 도둑이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라 있다고 합니다. 3월 25일이 그를 기리는 날입니다. 성 디스마스(St. Dismas), 그의 이름이 "디스마스"였다고 합니다. 저는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이집트의 콥트 교회가 이 사람을 주목하는 이유들을 종합해 보니까 다섯 가지로 정리됩니다. 결국,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이집트의 콥트 교회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이 사람을 다시 발견하였습니다.

1) 일찍이 교회가 이 도둑에게 주목하는 첫 번째 이유는, 기독교 역사에서 어느 누가 우리 주님으로부터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눅 23:43); 혹은 달리 번역하면, "아멘! 약속하지요. 당신은 오늘 나와 함께 파라다이스에 있을 겁니다."(사역); NAB Luke 23:43 He replied to him, "Amen, I say to you,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Luk 23:43 NAB); CJB Luke 23:43 Yeshua said to him, "Yes! I promise that you will be with me today in Gan-'Eden."(Luk 23:43 CJB). 이 도둑 외에 우리 주님에게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이 달리 또 있습니까? 이 죄수, 이 도둑 한 사람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직접 그의 낙원 입국을 허용하고 약속하고 보증까지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동의하든 안 하든 낙원 입국 첫 번째 비자를 받은 사람이 바로 이 사람입니다.

2) 교회가 일찍부터 이 도둑에게 주목하는 두 번째 이유는, 회개한 이 도둑이 우리 주님의 마지막 순간을 우리 주님 얼굴 가장 가까이에서 우리 주님의 임종을 지킨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당신의 아드님에게 가까이 갔던 것보다도 더 가까이에서 우리 주님을 위로하고 지킨 것이 이 도둑이라는 것입니다.

3) 교회가 일찍부터 이 도둑에게 주목하는 세 번째 이유는, 십자가에 달린 죄수 가운데 하나가 우리 주님을 모독하며 "네가 메시아라며? 메시아가 십자가에 달려? 어디 너 자신이나 먼저 구원해봐라. 그리고 어디 우리도 한 번 구원해보고"(사역 눅 23:39). 이렇게 또 다른 도둑이 우리 주님을 조롱할 때, 회개한 그 다른 죄수는 주님을 모욕하는 그 동료 도둑을 꾸짖으며 말합니다. "똑같은 처형을 받고 있는 주제에,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으냐?"(눅 23:40)고. 여기 이 말 속에 "하나님 무섭지도 않으냐" 하는 "하나님 경외(敬畏)"가 나옵니다. "우리야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지만"(눅 23:41a), 이 말 속에 이 죄수의 참회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다"(눅 23:41b). 회개한 이 죄인은, 이렇게 이런 말로 우리 주님을 위로해 드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위로해 드린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정죄하고 싶은 이 도둑은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변호한 적이 있습니까? 이 도둑은 했습니다.

4) 교회가 일찍부터 이 도둑에게 주목하는 네 번째 이유는, 이때쯤 아직 옆구리가 창에 찔리기 전, 아직 의식을 잃지 않으신 우리 주님께서는 이 사람을 향해 이미 마음을 여셨을 것 같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벌써 그를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서로를 향하고, 두 사람의 눈이 서로를 확인합니다. 두 사람이 그만큼 정서적으로 밀착(密着)했습니다.

5) 교회가 일찍부터 이 도둑에게 주목하는 다섯 번째 이유는, 이 도둑이 보여준 신앙입니다. 그는 저 세상까지 주님과 동행하고 싶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눅 23:42) 라고 간청했을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주님이 낙원의 주인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이사람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자기를 기억해 주실 것을 요청한 것이기에 예수께서는 "내가 진정으로 당신에게 말한다. 당신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다."(사역 눅 23:43) 하고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까, 십자가 형틀 위에서 들려 온 이 도둑과 우리 주님의 대화는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화인 것 같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새번역 롬 3:10)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의로운 사람일 수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될 때,
나에게 있던, 나는 의롭다고 하는 자기의가 깨어질 때,
“나는 의인이 아니고 죄인”이라는 것이 인식되기 시작할 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울려올 때,
우리에게서 우리 자신이 의롭다고 하는 착각이 사라질 때,
나는 하나님의 법 앞에서 떳떳하다고 하는 어리석은 착각이 사라질 때,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오만을 뉘우칠 때,

십자가 위에 달리셔서 강도를 용납하시는 우리 주님의 심정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금년 사순절에도 이 사람을 기억하면서 제 마음을 정화시키면서 우리 주님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고 합니다.

■ 민영진 박사는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로, 구약 신학학자로서 모두가 인정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성경번역가이다. 연세대신학대학을 거쳐 이스라엘 히브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민 목사는 '표준새번역'과 '새번역' '개역개정판' '공동번역' 등의 성경 개정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 설교는 지난 2019년 3월 10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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