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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6 (월)

[매일말씀묵상] 전승된 복음이 계시된 복음으로

기독일보 서형섭 목사 기자 (igmi@hanmail.net)

입력 2014. 01. 28 12:04  |  수정 2014. 01. 28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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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갈 1:11-24

♦오늘의 말씀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 그 후 삼년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 오일을 유할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23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철학자 탁석산은 6.25이후 한국 사회의 변천을 생존의 시대 - 생활의 시대 - 웰빙의 시대를 거쳐, 지금은 '의미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고 말했다(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그렇다. 지금은 의미를 찾는 시대이다.

우리 나라의 자살율은 현재 세계의 부자 나라인 OECD 회원국중 1위에 달하고 있다. 자살은 생의 막다른 길목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존재 상실, 의미 상실의 시위(demonstration)이다.

인간은 존재질문을 하는, 곧 세계와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를 묻는 유일한 존재자이다. 풀도, 나무도, 소도, 양도, 어떤 존재자들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가리켜 '존재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존재 자체를 가장 큰 문제로 삼는 존재'라고 규정하였다. 카뮈는 이 존재질문에 대해 '단 하나의 의미'도 찾지 못했다고 탄식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 질문은 '나는 왜 사는가?' 라는 의미 질문의 다름 아니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 이 궁극적 질문앞에 서게 된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궁극적 질문을 '일상에 대한 혐오감'이라고 말한다.

'나는 방금 파티에서 돌아오는 길이다. 나는 단연 파티의 주인공이었다. 재치있는 말들이 쉴 새 없이 나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웃음을 터뜨리면서 나를 부러움 섞인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 그러나 나는 떠나왔다 - 그리고 나 자신을 총으로 쏘고 싶었다"

한 번도 존재 질문에 맞닥뜨리지 않는 사람, 그의 일생은 다행인 것 같지만 그는 실상 가장 비참한 자이다.

기독교 역사에게 그 이름이 빛나는 사도 바울.

바울은 누구이며, 그는 왜 살았는가? 바울의 존재 질문과 의미 질문은 오늘 나를 향한 궁극적 질문에 되어 되돌아온다. 갈라디아서 말씀은 그 스스로 이 궁극적 질문에 대해 응답한다.

바울은 날 때부터 조상들이 믿는 유대교를 믿었다. 하나님을 믿는 모태신앙이었던 것이다.

그의 종교성은 남달리 각별하였다. 그는 동년배 신자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겼다(14절). 율법은 물론 신앙의 전통까지 철저히 지켰다(14절).

율법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죽음이다(신 21:23).

그래서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볼때 말도 안되는 이단이다. 유대교에 열심인 자들은 하나님이 저주한 자를 메시아(구원자)로 믿는 기독교인을 제거하는 것이 당연한 신앙의 헌신이다.

유대교가 자랑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의식과 행위의 준수에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영적 장치들을 다 주셨다. 양자됨, 영광, 언약, 율법, 예배, 약속, 조상들, 무엇보다 육신으로 그리스도가 그들 조상에게서 나왔다(롬 9:4-5). 다른 어떤 민족이라도 이것들 중 하나라도 갖지 못했다.

하나님을 믿는 데 있어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물론 바울도 그러하였다. 바울의 존재는 하나님을 믿는 자였고, 바울에게 있어 생의 의미는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었다. 율법을 다 지키고, 열심을 다하고, 이단을 배격하고….

그런데 그에게 생애적 반전이 일어난다.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이 부르신 자였다(15절).

이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그가 살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데에 있다(16절). 이는 '나는 왜 사는가?'라는 의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그는 유대교 신자로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겼으나, 그것은 그의 존재 이유도 사는 의미도 아니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의 존재를 새롭게 하였으며, 그가 사는 의미가 새롭게 하였는가! 이는 계시된 복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의 복음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다(11-12절).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다(12절). 바울은 고전 15:1-5절에서 자기가 전한 복음은 '받아서 전한 것', 즉 전승된 복음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사람에게서 받아서 전한 전승된 복음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된 것이라고 증거한다. 성경의 상충된 진리를 어찌 대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풀러신학교의 김세윤 교수는 전승된 복음이 계시된 복음으로 임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구원의 사건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바울 복음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복음과 전승으로서의 복음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여러 가지 해결방안 중에서 가장 낫다고 생각되는 것은 복음의 본질과 형식을 구별하여, 바울이 갈라디아서 1:12에서는 복음의 본질을, 고린도전서 15:1절 이하에서는 복음의 형식을 각각 언급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러한 접근방법 내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가 부활하여 높임받는 주이시며, 고린도전서 15:1절 이하의 전승은 이러한 복음의 본질을 문형화하여 표현한 것이라는 기독교 케리그마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는 데 있다"

전승된 복음이 없이는 계시된 복음도 없다. 전승된 복음은 지식 감정 의지등 혼적 영역에서도 얼마든지 동의될 수 있다. 하지만 복음이 전승으로만 머물면, 복음은 지식으로 그치고 감정으로 경험하고 의지적인 행동으로 그친다. 존재의 변화나 의미의 변화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며, 교리에 동의할 뿐이다.

전승된 복음이 성령을 통해 깨닫게 되는 계시된 복음이 될 때, 그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반전시키는 거룩한 능력이 된다. 복음이 계시로 임하자, 바울은 즉시로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해' 자신을 바친다(16절).

사람들(혈육)로부터 가르침을 받거나 도움도 받지 않는다(16절). 먼저 사도된 예루살렘에 거하는 제자들에게 배우지도 않는다(17절). 곧바로 이방지역의 아라비아와 다메섹으로 가서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을 증거한다.

그후 3년이 지난 다음 비로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복음의 교제를 나누다. 여기 3년이란 기간에 대해 논란이 많다. 혹자는 아라비아 3년을 예수님을 만난후 명상하고 은둔한 기간이라고 하여, 신학교를 빗대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전혀 근거없는 추측이며 영해이다.

그는 지체할수 없는 긴박감속에서 즉시로 복음을 전했으며, 당시 아라비아는 은둔에 적합한 사막이 아니라, 나바티아 왕국이 있는 이방인 지역이었고, 거처를 옮긴 다메섹에서는 핍박을 받으며 광주리에 실려 성벽을 타고 도망친 곳이다(고후 11:32-33). 은둔만 하고 수도생활만 했다면 핍박받을리 만무하다.

바울에게 계시된 복음은 은둔이나 명상을 통해 더 머물러야 할 복음이 아니라 즉시로 전파되어야 할 복음이었다. 이 아침, 계시된 복음으로 말미암은 바울의 생애적 반전앞에 내 온 영혼과 몸이 전율하고 있다.

나는 지금, 바울의 존재 질문 '나는 누구인가?'와 그의 의미 질문 '나는 왜 사는가?'에 하나님의 응답앞에 내게도 동일하게 응답하셨다는 감격에 사로잡혀 있다. 바울이 동갑자들보다 지나치게 열심히 믿었듯이, 나 역시 동기생, 동료 목사들에 비해 뒤지지 않는 열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사역해왔다.

목회, 내적치유, 가정사역, 십자가 복음사역에 이르기까지 1인 다역을 하며 열심을 다해 하나님을 섬겨왔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이 내게는 궁극적 존재이유도, 삶의 의미도 아님을 알려주셨다.

계시로 깨달은 복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과 사귐의 실제가 있는 통합된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을 위해 나를 모태로부터 선택하시고, 나를 은혜로 부르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 안에서 나는 모태로부터 택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제 하나님은 그 아들을 내 속에 나타내셨다.

복음은 계시로 내게 임했고, 그 아들을 세상에 전하는 이 일에 나를 부르신 것이다. 이 아침, 나의 존재 이유와 살아야 할 의미를 새롭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존재와 의미의 응답은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궁극적 질문을 묻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나는 그 응답을 받은 자이자, 동시에 이 질문을 묻는 자들에게 빚진 자이다. 내 속에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그의 아들을 전하는 삶, 이것이 빚을 갚은 평생의 사명이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 1:14-15).

♦묵상 기도

아버지.

내 존재와 삶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귀한 응답을 주셨건만, 스스로 존재를 천대하고, 잠시나마 의미없이 방황했던 종을 불쌍히 여기소서.

계시된 복음으로 바울의 존재와 의미를 새롭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제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셨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 누구와 의논하지 않고, 유력한 자들을 찾아가지 않고, 주어진 자리에서 제게 계시된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게 하소서.

저는 빚진 자입니다. 오늘도 존재의 무가치함과 목적없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저는 빚진 자입니다.

이 빚을 갚아가는 성실함과 겸손함으로 이 날을 살게 하소서. 평생을 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서형섭 목사는...

서 목사는 하나님의 검증을 마친 영적지도자다. 한국외대에서 경영학(B.A.)와 연세대 경영대학원 경영학(MBA)를 졸업하고, 서울신대 신학대학원 목회학(M. Div.)을 공부했다. 논문 '말씀묵상을 통한 영적 훈련'(Spriritual Training through Meditiatioin on the Word)으로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D. Min.) 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난 2000년 반석교회를 개척하고, 치유상담연구원에서 6년간 수학 후 겸임교수를 지내며 동시에 한국제자훈련원에서 8년간 사역총무를 역임했다.

현재 서형섭 목사는 말씀묵상선교회 대표로 섬기며 특히 '복음과 생명', '말씀묵상과 기독교 영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저술과 세미나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는 <말씀묵상이란 무엇인가>(갈릴리, 2011년)와 최근 출간된 <복음에서 생명으로>(이레서원, 2013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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