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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2 (금)

[김영한 칼럼] 섬기는 자로서의 나사렛 예수(IV)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 (editor@cdaily.co.kr)

입력 2017. 05. 26 11:41  |  수정 2017. 05. 26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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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예수 연구 시리즈>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 상임대표·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창립원장)

IX. 예수 섬김 정신의 신학적 원천

1. 하나님의 케노시스:

1) 예수의 자기 비움

나사렛 예수께서 보여주신 섬김의 정신은 그의 본성에서 나온다. 그의 본성은 그가 단순히 예언자였다는 사실을 너머서서 그가 "태초의 말씀"(the Word at the beginning)이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태초의 말씀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ó μονογενής υίός, the only begotten Son, 요 1:18)이라는 사실을 증언한다.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예수가 태초의 생명의 말씀(ó λόγος th/|ς zωh/|ς the Word of Life, 요일 1:1)이었다는 것을 증언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찬가(der Christus Hymnus)를 인용하면서 예수가 하나님의 본체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μορφῇ θεοu, morphē theou, the essential form of God)시나"(빌 2:6a). "하나님의 본체란 하나님의 형상(form)으로서 보이지 않는 성부의 보이는 모습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전 본성과 본질(the whole nature and essence of Deity)을 지니고 계신다. 예수는 하나님이 존재하는 바로 그 방식이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동질적 존재를 나타낸다.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셨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6b). 이 구절은 예수의 신적 동질성과 겸허한 모습을 말하고 있다. 예수는 자기의 신적 지위를 포기하고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인간의 신체를 입으셨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έκένωσε, ekenose, emptied)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7). 이는 하나님의 자기 비움(the self-emptying of God)이다. 예수의 자기 비움이란 하나님의 게노시스(kenosis)로서 바로 우주와 역사의 지고의 중요한 사건이다. 하나님이 자기를 비우셔서 인간 역사 속에 들어 오신 것이다. 첫 사람의 반역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우주와 역사가 예수의 자기 비움의 사건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되는 구속의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예수의 자기 비움의 겸허한 행위는 하나님의 구속사건을 가능케 하였다.

2) 하나님의 낮아지심

첫 사람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으나 성자 예수는 자신을 비어(κενόω, kenoō, emptying) 하나님의 지위를 버리시고 유한한 인간의 모습을 취하여 종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고 자신을 낮추었다. 하나님의 자기 비움이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제한하셨다는 것이다. 자기 제한이란 영적 존재인 로고스가 신체라는 형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낮추심이요 자기 제한이다. 자기 고양이 아니라 자기 비하(卑下)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빌 2:7-8a). 이는 성부 하나님과 함께 로고스로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성자의 자기 제한(the self-limitation)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겸허요 자기 낮춤이다. 이러한 자기 비움과 낮춤을 신성의 포기로 오해해서는 않된다. 자기를 비운 하나님의 로고스는 여전히 하나님이었으나 제2위라는 신성의 지위를 버리시고 인간이 되셨다. 다음 성경 구절은 예수가 여전히 신성을 지니고 있음을 증거해 준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3) 예수의 자기 포기

여기서 게노시스 이론을 제창한 토마시우스(Thomasius)의 주장처럼 그리스도의 자기 포기란 본질적 신성(전능, 편재, 전지 등)을 보유했으나 상대적 신성 (전능성, 편재성, 전지성)을 포기했다거나 메시아 의식을 포기했다고 해석해서는 않된다. 역사적 예수는 비록 인간의 죽을 몸과 인성으로서의 유한한 지성, 감정, 의지에 제한되셨으나 신성으로는 그 본질적인 면에서 있어서 조금도 이러한 제한에 구속받지 않은 상태로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음 구절에서 나타난 예수적 예수의 말씀은 그가 신성의 본질적 차원을 그대로 보유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b).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 10:30).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우리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포기하셨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b).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우리 죄의 대속물로서 자기 자신의 몸을 증여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기 주심이다. 하나님의 자기 주심은 하나님의 자기 포기요, 자기 버리심이요, 자기 부정이다. 하나님은 자기 주심을 통하여 그 분의 정의를 성취하신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결단코 그의 사랑 때문에 그의 정의를 포기하지 아니하신다.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은 예수의 사랑을 빙자하여 동성애를 허용하며 심지어 예수는 동성애를 금기(禁忌)하는 율법의 해방자라고 말한다. 이는 구약과 신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행위다. 동성애 옹호론자들은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정의로우심을 욕되게 하며, 우리의 죄 때문에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처형되도록 내어주신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섬김은 결단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희생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섬김이란 정의와 사랑이 입맞추는 나라요 공동체다.

2. 하나님 사랑의 화신(化身) 나사렛 예수

1) 사랑의 모범을 보여 주심

예수는 이 세상을 섬김을 통하여 하나님 사랑의 모범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셨다.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 사도 요한은 이러한 예수의 하나님 사랑 설교를 다음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은 그가 창조하신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비록 이 세상이 하나님을 거역한다 할찌라도 이 세상을 구속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어 주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자기 비움의 사랑(the kenotic love)은 하나님의 존재를 구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적-인간적 자기 주심(divine-human self-giving)을 통해 표현되어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악을 이기고, 구원을 수행하신다. 우주와 역사를 존재하도록 하는 기본원리는 단지 사랑이라는 자연의 낭만적 원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하나님의 사랑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자기 주심이요, 자기 아들의 주심이다. 예수는 성자로서 자원하여 인간의 대속을 위하여 인간의 몸(처녀 마리아)으로 자기 자신을 제한하셔서 하나님의 겸허를 보여주신 것이다. 역사적 예수의 섬김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근저에 깔려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주심이란 아버지가 바로 자기 자신을 주심이기 때문이다.

우주와 역사와 인생에 의미가 있는 것은 그것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근저에 하나님의 사랑이 원리로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보이기에는 역사와 우주와 인생이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부조리(사고와 재난과 질병과 이별과 슬픔과 고통)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고 모든 것이 우연이고 덧 없음 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무의미와 덧 없음을 극복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래서 역사와 우주와 자연에는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이란 덧 없이 보이는 우주와 역사와 인생의 의미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주와 역사와 인생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고 있다. 그것은 우주와 역사와 인생의 구속(救贖)이다.

2) 사랑의 계명을 주심

사랑의 모범이 되신 예수는 제자들에게 오늘날 우리들에게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신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5).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단지 신앙고백이나 교리적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차원에서 끝나서는 안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제자된 동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조건없이 사랑하며 조건없이 섬기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본래는 우뢰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만큼 성격이 급하고 주를 영접하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불을 내리기를 요구한 자였다. 누가는 이 사실을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4). 그는 본래 성격이 급하고 투쟁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든 그가 예수를 만나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 그의 성품이 차츰 변화하게 되었고, 예수의 사랑을 받은 제자로서 온유의 사람이 된다. 그는 예수의 사랑 정신을 받아 사랑의 사도가 된다. 그래서 요한은 성품으로 성화를 이루어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가 되어 그의 서신에서 형제 사랑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예수에 대한 사도 요한의 진정한 신앙이 성령의 열매(성화)를 맺은 것이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4-16). 사도 요한은 예수의 새 사랑 개념을 가장 실천적으로 구현한 제자이다.

그는 사랑의 원천을 알고 하나님의 본성을 알며, 예수 십자가 죽으심의 위대한 비밀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아는 자로서 제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 위에서 실천하는 것이라고 증언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7-10).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 제물이 되신 예수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며, 이것이야 말로 섬김의 극치인 것이다. 아가페의 사랑만이 무조건적 섬김을 이행할 수 있게 한다.

X. 나사렛 예수의 섬김 - 교회의 사회 봉사(섬김)의 전거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말씀하신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7-8). 예수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길은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의 섬김은 그를 따르는 자들의 디아코니(Diakonie), 봉사직무의 전거(典據)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회봉사의 신학적 귀감(龜鑑)이 되시고 기초가 되신다. 지상의 교회는 이 땅 위에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작은 예수로서 예수의 섬김 사역을 실천하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오늘날 기구나 관청이 되어 버린 유럽의 교회나 권위적 지배의 교권적 위계질서가 되어 버린 가톨릭 교회처럼 민중이나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종으로서 겸허하게 섬기기 위해서 존재한다. 이러한 종으로서 섬기는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교회의 진실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회봉사는 섬기는 종, 그리스도의 섬김 사역에 근거하면서 그리스도가 증거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도록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는 모든 행위를 포괄한다. 선교만 하고 섬기지 않는 교회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교회의 선포에는 섬김이 동반되어야 한다. 섬김이 동반하지 않는 교회는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자기 기구 중심으로 자기 소속원들을 위하여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반대로 이 세상을 섬기고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오늘도 자기 자신을 이 세상을 위하여 주고 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웃을 섬기는 자의 공동체로서 존재한다. 교회는 이웃을 위하여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하여 존재한다. 교회는 신자들의 공동체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이 공동체에 아직도 속하지 아니하고 있는 자들 그리고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눌린 자들의 친구요 저들을 섬기는 공동체로서 존재한다.

루터는 말하기를 "기독자는 내면적으로는 어느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자다. 그러나 외면적으로는 이웃을 향한 봉사자다" 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를 택하신 것은 신자들만의 구원과 복락만이 아니라 신자들을 통하여 이웃과 세상의 구원과 복락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훼퍼(D. Bonhoeffer)가 말하는 것처럼, 교회는 "타자를 위한 존재"(Sein für andere)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타자를 위하여 존재할 때만 교회이다."(Dieterich Bonhoeffer, Widerstand und Ergebung. München 1982, p. 261) 본회퍼는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만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 속에 있는 자들과 연대하며, 저들과 함께 살고, 함께 고통받으며, 함께 기뻐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길을 찾는 교회를 역설하고 있다. 여기서 교회의 중요한 사회봉사로는 단순히 구제하는 자선사업의 차원을 넘어서서 고통받는 자들, 가난한 자들, 사회로부터 소외된 자들, 아직도 방황하고 있는 자들, 더 이상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자들과 연대하는 사회적 행위를 말한다.

교회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사회(postmodern society)에서 그리스도가 비유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good Samaritan)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에 대하여 그를 마땅히 구해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당시의 종교인들(제사장, 레위인 등)은 지나가 버렸으나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무명의 사마리아인이 그를 구출해준 것처럼 교회는 이 시대에서 사마리아인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이웃을 향한 봉사는 예수의 섬김에 참여하는 것이다. 섬김에의 참여는 소외된 자들과 고통을 나누는 것이며 그들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들의 고통을 떠맡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매일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섬김 속에서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의 현존과 권능을 매순간 체험한다.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소망만이 비로소 교회로 하여금 자기중심적 삶을 포기하면서 이려움 속에 있는 이웃을 향하여 유대를 공고히 하고 사랑을 실천하도록 한다. 사회적 약자들은 더 이상 자선의 대상이 아니다. 이들은 오늘날 예수의 모습을 재현해준다. 교회는 이들을 통해 이들과 동일시 되려고 하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세상은 교회가 바로 지상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알게 된다. 교회는 오늘날 섬김의 공동체로서만 섬김의 원형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다. <끝>

글ㅣ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상임대표/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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