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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4 (금)

[김영한 시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 세상의 고난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나님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

입력 2015. 04. 05 11:06  |  수정 2015. 04. 05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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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에 명상해보는 십자가 신앙의 의미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 상임대표·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창립원장)

■ 머리말

사순절의 절정에 이른 고난주간이 진행되고 있다. 이 고난주간은 단순히 종교적 의미의 개인의 경건 차원을 넘어서서 인간의 죄와 고통의 현장에 찾아와 주시는 고난의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이 짊어지신 십자가는 단순히 경건한 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와 고통 가운데 있는 전 인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필자는 다가오는 성금요일(Good Friday)을 맞이하면서 이 세상의 죄와 고통, 가난과 질병, 이슬람 무장단체(IS)의 살육 등 각 종 테러와 민족들의 분쟁, 사회적 갈등, 커져가고 있는 사회적 빈부 격차를 치유하시기 위해, 신음하고 있는 이 세상 그리고 오늘날 우리를 위하여 받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성찰하고자 한다.

1. 사순절은 이 세상의 고난에 관여하시는 하나님의 고통을 증시

프랑스의 실존주의 문학가 가뮤(Albert Camus), 독일의 비판사회학자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와 같은 항의 무신론자들(protest atheists)은 이 세상의 고통과 질병 등 각종 고난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거나 하나님이 존재하드라도 이 세상의 고난에 대하여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더 멀리 계시는 천상의 존재로 보았다. 세상의 악과 고통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하신 존재(신정론, 神正論, theodicy)에 대하여 비판하는 자들은 설령 하나님이 있다고 하드라도 이 세상에 있는 각종 고통과 재난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악한 신이나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의 악과 인간의 고난과 고통은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죄의 결과로 일어난 것으로 우리들에게 교훈해 주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고통과 고난에 대하여 성경의 하나님은 무관심하고 관여하시지 않는 분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항상 같이 동참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소자를 자신과 동일시하셨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b)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b). 이 소자란 헐벗은 자요, 말기암으로 죽어가는 자요,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 중동 등 각 지역 전쟁에서 참살당하는 자들과 피난민들, 박해당하는 북한주민들, 특히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자들, 탈북자들 등 사회생활 가운데 우리들이 날마다 만나거나 뉴스를 통하여 접하는 자들이다.

이 세상의 재난, 전쟁, 고난과 고통, 죄에 대해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 안에서 인간이 되셔서 친히 율법의 굴레 속으로 들어오셔서 인간이 가진 모든 고난과 고통을 체감하시고 십자가 대속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 고난주간이란 이러한 주 예수께서 가신 대속의 길을 기도와 금식과 명상 가운데서 성찰하는 시간이다. 예수의 십자가 고난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재난과 불행인 죄와 질병과 죽음에 대하여 초연하시고 침묵하시는 무감정의 신이 아니라, 아들 예수가 십자가 상에서 당하는 고통과 죽음을 친히 겪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나 몰트만은 이러한 항의 무신론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고난당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은 성경의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표현한 것이다.

이신론자들(deists)은 하나님이란 고통이나 죽음을 초월하여 있는 무감정의 존재라고 생각했으나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의 현장에 내려오셔서 감찰하시고 구원하시는 출애굽의 하나님이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출 3:7-8a). 출애굽의 하나님은 신약에 와서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속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세상의 재난과 인간 죄에 대하여 무관심한 분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안에서 친히 우리 가운데 인간으로 오셔서 세상의 고통과 인간의 죄를 해결하신 분이시다. 여기서 리츨의 제자 요한 코트쉬크(Johannes Gottschick)의 다음 문장은 항의 무신론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 된다. "예수 없이는 나는 무신론자이었을 것이다."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심으로 하나님은 세상과 인간을 위해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드러내셨다. 이 주님의 십자가 고난과 대속으로 오늘날 우리의 죄가 속해졌고 죄와 사망의 역사는 은혜와 소망과 생명의 역사로 전환한 것이다.

2. 이신론(理神論)적 하나님 이해를 수정(修正)한 예수의 십자가 사건

하나님 아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사건 속에서 인간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감정한 천상의 신을 말하는 이신론적 신(deistic God) 개념은 무너진다. 십자가의 죽음은 단순히 인간 예수의 죽음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되며 하나님 아들의 죽음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아들이 아버지의 인류대속 언약을 실행하시는 삼위일체적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삼위일체적 사건은 게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예수의 기도 속에서 이해된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 17:1b),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아버지여 만일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42) 라는 기도는 예수와 하나님의 깊은 부자(父子)관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십자가 상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 27:46b) 라는 아들의 절규는 아버지를 향한 절규이며, 이 절규는 성령 안에서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기도와 신뢰를 내면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이 아들의 절규 가운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부에 일어난 인격적 언약적 사건이 내포되어 있다(필자,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개정증보판, 2003, 517-520)

아들의 십자가 고난 가운데 아버지 하나님은 부재(不在)의 모습으로 임재하시고 둘 사이를 내면적으로 연결해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여기서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아들 안에서 고난받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이다. 오늘날 인류 역사가 당하고 있는 고난, 6.25 전쟁의 비극과 고통, 일본 후쿠시마의 지진과 해일이 가져온 참사의 고통, 4.16 세월호 참사의 고통, 오늘 중동지역 이슬람 무장세력 IS에 의하여 빚어진 살상의 비극 가운데서 하나님은 무관심하거나 초연하시지 않으시고 재난과 불행에 휘말린 인간들이 당하는 고난과 고통 가운데 같이 계시는 고난받으시는 공감의 하나님(God in empathy)으로 다가오신다. 여기에 우리는 세상과 인간 역사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즉 하나님의 인간성과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다.

3. 십자가 대속 없는 부활 승리 없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요 부활의 승리는 역사의 모든 고통과 고난을 극복하는 하나님의 주권의 선포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부활의 승리에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이라는 희생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이라는 대속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 그냥 부활의 승리축제에 도취하는 기독교는 번영의 종교와 기복종교에 다를 바 없다. 과정의 진통보다는 결과의 열매만 따먹으려는

종교는 무속종교와 제의종교다. 사순절의 깊은 명상과 고난 체험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과 기쁨은 신자들에게 놀라운 영성의 체험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게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가능하시면 이 고난의 잔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어주지 아니했으며 예수는 이 고난의 잔, 십자가를 져야했다. 이는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모든 인간들의 죄와 악의 문제를 대신 짊어지시는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섭리였다. 오로지 인류 역사에 나타난 유일한 의인(義人)이신 하나님의 아들만이 십자가에서 인류가 저지른 여태까지의 죄와 앞으로 지을 죄 모두를 대속하기 위하여 대속(代贖)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십자가에서 몸의 고통 속에서 인격적 멸시와 학대를 받으시고 그의 영으로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까지 버림을 당하셨다. 이 수난절의 고난은 단지 종교적 경건을 넘어서서 오늘날 우리 지구촌 인류들이 당하는 고통을 대신 짊어지신 하나님 아들의 인간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 사실적 증시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 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죄와 세상의 악을 제거하기 위하여 스스로 자신을 대속물(代贖物)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3.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기복종교로 변질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진정한 성경의 기독교가 아니다. 십자가의 고난에 대한 깊은 체험 없이는 부활의 영광에 대한 깊은 체험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한갓 자연종교와 일치되는 기복 종교일 뿐이다. 기복종교는 자신의 헌신과 희생보다는 신령에게 제물을 드려서 신을 감동시켜서 신령으로부터 복을 받아내려고 하는 종교이다. 여기에는 철저한 현세의 번영과 성공주의가 작용한다. 그리고 윤리가 없다. 이웃을 섬기는 헌신과 자기 희생의 윤리가 없다. 공동체의 윤리가 없고 오로지 자신의 성공과 번영과 안일이 지고의 목표다.

스위스의 신학자 에밀 브루너(Emil Brunner)가 지적한 바같이 역사적 기독교는 콘스탄틴 대제로부터 313년 밀라노 칙령에 의하여 공적 종교로 공인받고, 테오도시우스 1세가 선포한 380년 테살로니카 칙령에 의해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로마의 국교가 되고 난 뒤 수세기동안 박해를 피하여 좁은 통로로 이루어진 지하묘지, 카타콤(Catacomb)에서 숨어 지냈던 기독교 설교자들은 로마제국 궁정의 설교가가 되면서 역사적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에서 제도의 종교로 바뀌고 점차 교인들에게 복과 번영을 기구해주는 기복종교의 모습으로 변질하는 상황을 연출하였다. 그것은 중세 후기에 면죄부 판매로 나타났고 성직매매로 나타났다. 성례전에는 떡과 포도주가 신부(神父)의 축성과 더불어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이라는 마술(魔術)로 나타났다. 이러한 로마 천주교의 제도화된 기독교는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을 통하여 개혁교회 안에서는 수정되었으나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러한 종교개혁의 전통에서 다시 멀어져서 회개없는 기독교, 십자가 없는 기독교로 변질하고 있다. 교회는 오늘날 단지 복받는 전당으로, 적지 않은 신앙 집회들이 진정한 회개와 통회 없이 축복과 번영이 선포되는 부흥회로 변질하고 있다.

4. 섬김 정신이 부재한 기독교 지도자들의 권력과 명예추구는 사회를 향한 부끄러움이다

초기 한국기독교는 복음전파와 더불어 근대적 가치관(사민평등, 근대 교육, 여성 교육, 나라의 독립과 물산 장려운동 등)도입에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 초기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모두 자신을 조국의 근대화와 독립이라는 대의(大義)를 위하여 헌신하는 숭고한 뜻을 지닌 지사(志士)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가 한국사회의 제도종교가 된 이후 여러 가지 사회적 명예와 권력이 주어지자 교회와 연합기관은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자들에 의하여 그 초기 지도자들의 위대한 정신이 가리어지고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기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한국개신교는 KNCC와 보수교단으로 나누어져 있고 20여 년 동안 보수교단 연합운동의 구심점이 된 한기총은 최근 권력투쟁으로 내분이 일어나 한교연이 갈라져 나가 분열되어 있으며 이번 부활절 연합예배도 하나로 모여 한 마음으로 드리지 못하고 각기 따로 드리는 형편이다. 연합기관 사이의 갈등과 분열은 아직도 제대로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이에 구약의 예언자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각 일을 시키는 도다. 보라 너흐가 금식하면서 악한 주먹으로 치는 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사 58:3b-4).

샬롬나비가 수난절 성명서(2015년 3월 29일)에서 지적하는 바 같이 오늘날 한기총, 한교연 등 기독교 연합단체들이 비판의식을 가진 평신도들과 사회인들의 평가에 의하면 목사들의 명예 추구의 전당이 되어버린 현실이다. 적지 않는 교회가 대형화 및 기업형 구조를 추구하여 세계적인 초대형교회를 만들어 블랙홀처럼 지역의 성도를 빨아들이면서 공동체적 교회의 가치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는 십자가 복음이 전하는 기독교의 희생과 헌신 정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러한 종교개혁의 전통에서 다시 멀어져서 회개없는 기독교, 십자가 없는 기독교, 단지 복받는 전당으로 변질하고 있으며 각종 부흥회도 말씀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사경회에서 만사 형통 복을 받는 부흥회로 변질하고 있다.

이번 수난주간을 통하여 한국교회는 지도자들부터 먼저 철저히 회개하여 교회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았던 복을 나누어주고 세상을 섬기는 공동체로 탈바꿈해야 한다. 수난 주간의 자기 성찰을 통하여 한국교회가 우리 가까운 이웃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지 진지하게 명상하고 교회가 소외된 지역 이웃과 함께하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행사들을 거행하는 것을 성찰해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5. 우리 죄와 허물을 철저히 회개하고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는 신앙의 결단이 요청된다

이 수난주간의 의미는 단순히 종교적 예식에 참여함으로써 단순히 경건해지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우리 속에 남아있는 죄를 죽이는 철저한 회개운동이 있어야 한다.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John Owen)은 저서 『내 안의 죄 죽이기』는 수난주간 우리 자신을 명상하며 자신의 죄성을 발견하는 좋은 영적 안내서다. 오웬은 로마서 8장 13절의 말씀을 주해하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고 있다. 오웬은 우리 속에 감추인 동기와 정욕과 본능과의 싸움을 선언한다. 오웬은 죄를 죽이는 노력에 있어서 인간적인 방법의 고행주의 태도와 그리스도의 은혜를 강조한 자유방임적인 태도를 함께 경계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이 세상에서 부름받을 때까지 자신 안에 역사하는 죄와 타락한 본성에 대항해서 일생 동안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은 보혈의 피"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죄의 성격과 함께 성령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오웬은 강조한다.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거룩한 삶을 열망하라!" "우리의 날은 항상 죄가 이기든지 아니면 죄를 죽이든지 양자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은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의 욕심을 버리는 연습을 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이를 위하여는 우리의 매일의 생활 가운데서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사는 삶의 훈련을 해야 할 것이다.

6. 한국사회와 한반도의 고난현실에 참여하는 한국교회

이 수난주간에 한국교회는 먼저 자신의 죄와 허물과 부덕을 성찰하고 회개할 뿐 아니라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갈등 해결을 위하여 그리고 한반도의 고난, 즉 억압체제 속에 있는 우리의 동포 북한 주민들의 안녕과 복지와 인권향상을 위하여 기도하며 그리고 실천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제 자기 죄를 회개하는 개인적 경건의 차원에만 머물러서는 안되며 북녘 겨레들의 삶의 행복과 평화통일 위하여 기도하고 우리가 가진 풍요한 물자들을 물자에 쪼달린 저들과 나누어야 한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사회적 경건에 이르는 참된 금식을 가르쳐주고 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애의 줄을 끌려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꺽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7). 흉악 속에 있는 자의 결박을 풀어주고, 멍애의 줄에 묶인 자들을 풀어주고, 압제당하는 자들을 자유하게하고, 모든 멍애에서 해방시켜주는 것, 주린 자를 먹이는 것, 빈민을 받아들이는 것, 헐벗은 자들을 입히는 것, 자기 친척을 돌보는 것은 경건이 자기(自己)의(義) 세우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선행의 나눔과 섬김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한국교회에 소망이 있는 것은 순수한 소명과 헌신 속에서 작은 공동체에서 그들의 양떼를 돌보며 사회적 소외자들에 대한 나눔과 섬김을 행하고 있는 수많은 무명의 목회자들이 곳곳에 있으며 이러한 사회적 선행에 참여하고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수많은 성도들의 기도와 헌신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분단 70주년이 지났으나 전혀 앞길이 보이지 않는 남북통일의 길, 북한 주민들의 인권박해와 신앙적 박해를 받고 있는 북한 주민들에 대한 중보기도와 저들의 인권을 위한 북한주민인권 법 통과를 위한 노력과 저들과의 물자 나눔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 들어온 탈북자들에 대한 교회의 관심과 돌봄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소외 속에 있는 계층의 지극히 작은 소자들에게 저들의 형편을 들어주고 저들의 어려운 심정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 맺음말

이제 선교 130주년을 맞는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은 사순절과 수난 주간을 맞이하여 신앙의 경건을 표시하는 방식이 보다 성숙해져야 하겠다. 수난주간에 우리의 명상이 자기 개인의 구원과 가족과 교회 식구들의 구원과 복받음의 차원에 그쳐서는 아직도 우리의 신앙은 초보의 단계에만 머무는 것이다. 이제는 보다 신앙의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이웃과 사회적 나눔과 섬김의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고난주간 명상이 이 세상의 고난과 고통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 안에서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바로 네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면서 우리 주변과 사회에서 소외된 지극히 작은 자들을 돌보고, 더 나아가 지구촌의 고통의 성찰로 나아가야 한다. 이 사순절에 우리는 앞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와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도록 중보기도하며, 나눔과 섬김의 실천으로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더 넓은 의미의 경건을 실천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한다. (끝)

글ㅣ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 상임대표·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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