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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3 (토)

[김영주 설교] “신비를 가슴에 안고”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 (press@cdaily.co.kr)

입력 2019. 01. 10 12:27  |  수정 2019. 01. 10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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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일과: 사 60:1-6, 엡 3:1-12, 마2:1-12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NCCK 전 총무 김영주 목사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NCCK 전 총무 김영주 목사 ©기독일보DB

한 해를 보냈습니다. 시간에 대한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괴물이 바로 '시간'이다. 시간은 쏜살같이 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미래에 진입한다. 그 결과 우리에게 남는 것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회상뿐이며,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것도 바로 시간의 흔적이다. 과거는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회상해 보면 보람된 세월이었기도 하지만 또한 아쉬운 세월이었기도 합니다. 지난 한 해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은 갈등과 분쟁으로 전쟁 직전까지 위협이 고조되던 한반도에 화해와 평화의 문을 열어놓게 되어 우리 모두에게 큰 희망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가진 자들의 갑 질, 여성에 대한 혐오, 사회적 약자들을 비롯한 에멘 난민에 대한 혐오 등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의 천박함을 보는 것 같아 매우 씁쓸한 일이었습니다. 기름 저장 탱크의 화재를 비롯한 크고 작은 화재, 온수관 파열, 음주 운전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버린 사건들, 특히 팬션의 가스관 배출로 인해 젊은이들의 죽음, 서해발전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은 우리사회의 안전 불감증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사회 뿐 아니라 우리 가정에도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기쁜 일들과 슬픈 일들, 그리고 보람된 일들과 후회스러운 일들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날을 회상해 보는 것은 앞으로 우리에게 열릴 새날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기 위함입니다.

새 해 첫 머리에 서서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어떻게 한 해를 시작할까 생각해 봅니다.(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제와 오늘이 그렇게 다르지 않는데 우리는 ‘왜 어제와 오늘에 경계선을 그어 지난날과 오늘을 구분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흘러가는 양적인 시간 즉 크로노스(chronos)가 아니라, 영원한 질적인 시간인 '카이로스(kairos)'를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을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카이로스 시간은 질적인 시간,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지만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시간이며, '결정적 순간'입니다. ‘오늘’ 아니 ‘지금’은 과거와 미래를 잇는 지극히 짧은 시간이지만 카이로스적인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력으로도 오늘은 주현절입니다. (에피파니(ephiphany)는 '신이 자신을 찾는 이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에피파니의 순간에 우리는 자신이 가야할 길과 해야 할 일을 찾아내야 합니다.

즉 우리들에게 오신 주님을 만나서 그 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구약 말씀인 이사야서(60:1-6)는 하나님이 오실 때 이스라엘이 받을 영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서 태양처럼 빛나라.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비치고 있다. 그때 너는 이것을 보고 희색이 만면하여, 너무 기쁜 나머지 흥분하여 가슴이 두근거릴 것이다.

복음서(마태)는 동방박사들이 아기예수를 만나기 위해 온 여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10-11) 그 별을 보고 박사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아기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에게 경배한 후 보물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렸다.

서신서(에베소서3:7-11)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바울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계시로 나에게 그분의 신비로운 계획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 가운데서 가장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풍성하신 기쁜 소식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게 하시고 또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오래 전부터 숨겨졌던 신비로운 계획이 어떤 것인가를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 말씀을 이렇게 읽습니다.

이사야서(구약)은 하나님의 현현(도래)이 가져다 줄 미래를 예언한 것이라면, 복음서(마태)는 하나님의 현현을 찾아 나서서 마침내 그 분을 만난 기쁨으로 온 몸과 마음을 드려 승복을 표현한 것이고, 서신서(에베소서)는 하나님의 현현을 통해 사명 받은 사람들의 삶의 자세와 노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현현에의 소망을 가지고 그 현현을 경험하는 사람들이고 그 현현 속에서 그분의 신비로운 계획을 수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저는 우리 공동체 식구들에게 이 아침 예배가 많은 예배의 하나가 아니라, 주님을 만나는 영광을 경험하고 그분의 크고 놀라운 뜻을 깨닫고 그렇게 살겠다고 결단하는 거룩한 시간(카이로스의 시간)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다시 성경을 읽어봅니다.

그때 너는 이것을 보고 희색이 만면하여, 너무 기쁜 나머지 흥분하여 가슴이 두근거릴 것이다.

그 별을 보고 박사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아기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에게 경배한 후 보물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렸다.

또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오래 전부터 숨겨졌던 신비로운 계획이 어떤 것인가를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내 자신에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을 듣고 희색이 만면하여 너무 기쁜 나머지 흥분하여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는지, 기나긴 여정의 마지막 지점에서 동방박사들처럼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지, 그리고 바울선생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 가운데서 가장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이 은혜 즉 계시로 나에게 그분의 신비로운 계획을 알려 주셨습니다.”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 아침 우리에게 오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전적으로 복종을 맹세하고 신비로운 계획을 가슴에 간직해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어떻게 예수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별을 따라 길을 나선 동방박사들은 헤롯의 궁전으로 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고 있습니다. 왕을 비롯한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이 모여 예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신다는 해석을 듣습니다.

동방박사들의 두 가지 실수는 예수의 탄생을 유대왕의 탄생으로 이해하였고, 그것을 헤롯과 학자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물었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예수는 애굽에서 난민 생활을 하게 되었고,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의 어린아이들의 학살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우리도 똑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는 한 가난한 목수와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왕은커녕 권력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나사렛의 한 시골뜨기로 대접받고 살아가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를 권력의 최 정점에 선 왕으로, 우리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시는 신출 기묘한 능력을 가진 분으로 포장하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는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일탈을 보고 있습니다. 권력자 주변의 사람들의 오만은 우리 모두들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왕으로 이해하는 오늘의 교회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낮은 자리에 앉기보다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섬기기보다는 다스리기를 좋아하고 듣기보다는 가르치기를 즐겨하는 것입니다. 소통하기보다는 일방적이며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독선적입니다.

예수를 왕으로 이해하는 한, 교회는 자기 겸손을 잊어버리고 오만해지기 마련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아도 이러한 점은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 제자의 우두머리를 황제라고 부르고, 교황은 하나님의 성전(베드로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면별부를 팔았고, 이교도들을 정복한다는 이유로 십자군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신앙으로 무장한 서구는 동아시아를 식민지화하는 데 거침이 없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헤롯 왕과 그 무리들에게 예수의 탄생지를 묻지 말아야 했습니다. 아마 동방박사들은 이미 율법과 정치 경제 사회에 전반에 걸쳐 많은 학문과 지식을 잘 갖추고 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입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은 하늘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의 학문은 권력과 권위 유지를 위해 사용하는 도구였으며, 권력 유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있는 무리들이었습니다.

하늘의 별을 따라 나선 동방박사들은 끝까지 별을 따라 갔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예수 믿는다는 것은?)

최근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서울대학교 물리대학을 다니다가 전태일의 죽음을 보고, 학교를 자퇴하고 한동안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예수, 공자, 마르크스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모처럼 만났던지라, 과거에 우리가 만났던 인연 그리고 그 이후 그의 생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한 때 마르크스의 제자가 되어 혁명을 꿈꾸며 그 혁명의 길을 찾기 위해 인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인문학은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인간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언어를 공부했고, 시간 속에서 살아갔던 인간과 사회 공동체를 알기위해 역사를 공부했으며, 인간 존재의 근본에 대한 지혜를 얻기 위해 철학을 공부했지만, 아직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짐작하기에는 그는 인문학을 넘어선 신의 영역을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와 장시간 대화를 나누면서 바울을 생각했습니다. 이미 익히 아는 대로 바울은 많은 공부가 된 사람이었고 또 열정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4 하기야, 나는 육체에도 신뢰를 둘 만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체에 신뢰를 둘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5 나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6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하였고,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습니다.) 바울을 그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다메섹을 향해 가다가 예수를 만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을 받고 내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오래 전에 숨겨졌던 신비로운 계획 (즉 가장 보잘것없는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풍성하신 기쁜 소식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게 하시고 또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오래 전부터 숨겨졌던 신비로운 계획이 어떤 것인가를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입니다.)을 깨닫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 복음의 전파자로 나섭니다.

바울은 자신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나에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은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오물로 여깁니다.

그 친구는 인문학에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당위와 방법을 찾기 위해 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를 만났고 그 예수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았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만나기는 했지만, 예수를 온 몸과 마음으로 영접하고, 그 분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결단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찬송가(302)의 가사는 저 자신을 비롯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절.
왜 너 인생은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다 물결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번 헤아려 안보나

3절.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보고 마음 약하여 못가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아는 것에서 머물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동방박사들이 예수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듯이 나를 바치는 것이고 바울처럼 내가 생각했던 귀중한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아침에 다시 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을 깨닫고 그 것을 위해 나 자신을 바치고 있는가.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게 여긴다고 고백하며, 그의 현재와 미래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정받으려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오늘 이 아침 에피파니의 첫 주일에 저는 예수를 만나 그분에게 순종을 맹세하고 그 분이 주신 오롯한 신비(비밀)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간직한 바울은 큰 열정을 가지고 복음 사업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열정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입니다. 영어로는 passion입니다. 이 passion은 고대 그리스어 '파세인(pathein)에서 나왔는데, 기본적인 의미는 고통이고,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해할 수 없고, 낯설고, 어렵고, 불편한 현실을 십자가를 짊어지듯 나의 어깨 위에 매는 행위"입니다.( 열정은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대문자로 Passion하면, 그것은 "예수의 수난"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의 열정적인 삶의 과정에서 당한 고초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고후 1:8-9)

신비를 간직한 바울에게는 그 어떤 고난과 고초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간직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에 대한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행복한 마음의 상태는 '흔들림 없는 고요한 마음'이다. 그러니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외부의 환경이 나의 행복에 영향을 끼칠 수는 없다.

바울은 자신의 고유한 임무 즉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을 위해 ‘(갈라디아서6:17)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내 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시 제게 묻습니다.

내 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낙인 찍혀 있는가. 그래서 행복한가.

* 설교는 2019년 1월 6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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