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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2 (화)

[김고광 설교] "힘없는 예수"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 (press@cdaily.co.kr)

입력 2018. 11. 28 07:08  |  수정 2018. 11. 28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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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23:1~7, 시132:1~12, 계1:4b~8, 요18:33~38

수표교교회 김고광 원로목사.
수표교교회 김고광 원로목사.

오늘은 교회력으로 2018년, 한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역시 교회력으로는 다음주일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중심으로 시작하는 강림절 첫 주일, 새해 철 주일이 시작도비니다.

오늘은 성서일과에 따른 본문 중에서 복음서 중심으로 함께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클라이맥스가 되는 십자가 사건의 현실적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제국의 총독 빌라도의 심문과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시작되는 우주적 사건의 출발점은 이 지구상에서도 작은 나라, 이스라엘 땅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주적 사건과 지상의 작은 나라, 바깥의 수많은 사람들과 집안의 소수의 사람들은 대조적입니다. 위대한 우주적 사건은 저 높고 큰 하늘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오늘 본문인 복음서 저자의 초점은 아주 다른 차원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 총독관저 밖에서 유대인들이 그 지도자란 사람들의 선동에 따라서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같은 동독 중에서도 서울 출신도 아닌 먼 지방출신, 그것도 대단한 배경과 지위와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볼품없는 자천타천으로 이름뿐인 랍비, 나사렛 출신이 목수가 직업인 한 사람을 죽이느니 살리느니 하면서 폴동 같은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여기서 출발하지 않고, 총독관저 안의 비교적 조용한 법정 같은 분위기에 사건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거기에도 저 바깥의 군중들과는 신분과 가진 것이 다른 소위 말하는 여러 계층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의 초점은 그들에게가 아니라 두 사람에게로 좁히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모든 힘을 가진 제국의 총독이고 다른 한 사람은 힘없이 초라한 한 시골청년입니다.

오늘 우리의 복음서 저자는 이 두 사람의 위치와 힘에는 관심 없이 그들의 나누는 조용한 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조용한 대화는 질문과 대답으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사람의 대화는 지금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시끄러운 함성들과 이 총독관저를 자유롭게 출입 할 수 있는 이런저런 종류의 지도자들이 나누고 있는 현실적인 이야기와는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질문하는 내용은 슈타켄부르크에 이하면 철학적인 회의도 아니고, 냉철한 아이로니도 아니고, 그렇다고 진리를 향한 진지한 질문도 아닙니다 (R. Schnakenburg. John. Vol. Ⅲ 250쪽 참조).

그러나 총독 빌라도의 이 질문은 비현실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그러나 그게 의도했는지 아닌지에 관계없이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현실에 대해서 묻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전 생애와 말씀, 특히 십자가 사건의 전체의 실체와 그 의미를 묻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 대답입니다.

그런데 이 두사람의 대화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생뚱맞은 것입니다. 현실적이지 않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는 관계가 없는 한가한 질문입니다. 그런 대화는 모든 것이 안정되고 평화로울 때에나 하는 대화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이 대화는 가장 현실적이고 긴급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가장 절실한 물음이면서 동시에 가장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이 대화는 정치도, 대중도,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의 삶의 근본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질문은 우리 모두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서에는 총독 빌라도 예수님과 나누는 대화에는 세 가지 질문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1) 네가 왕이냐? -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대답 : 그런 질문을 하는 동기와 상관없이 네 말대로 '나는 왕이다'.

2)그렇다면 어느 나라 왕이냐? - 본인이 임금이라고 자기정체를 밝혔으니 이 두 번째 질문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대답: 애매한 대답입니다. 나의 왕국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ㅇ낳고 하늘에 속한 나라이다.

3)솔직하게 말하면 어느 것이 진리냐? - 애매한 예수님의 대답을 들으면서 총독 빌라도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대답: 복음서 기자는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즉답을 싣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대답은 예수를 따르는 우리 자신들에게 맡겨진 질문이고 대답입니다.

오늘도 세상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무슨 말재주를 키워서 할 수 있는 대답이 아닙니다.

그래봤자 아무 힘도 쓰지 못하니까요.

오늘 예수님은 총독같이 힘 잇는 사람들에게나, 종교 권력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나, 또 순진하게 믿고 따른다는 사람들에게 조차도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오히려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는 매우 가슴 아프고 슬프고 두려운 현실입니다.

2천년의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 세상에 가는 곳곳마다 예수님의 이름이 알려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오늘도 세사의 법정에 세워진 예수님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힘이 없습니다. 한때는 예수님을 따르는 성직자들이 힘이 있었고 교회는 국가 위에 군림하는 힘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힘들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힘 있는 종교와 종교인이 되려고 몸부림 치고 살고 또 싸우고 있습니다.

네가 왕이냐? 묻는 질문에는 네 출신 지역이 무어냐? 네 경력과 학력은 어느 정도냐? 네가 가진 지위와 권력은 얼마나 크냐? 한마디로 네 힘은 얼마나 크냐? 나보다 힘이 세냐? 라고 묻는 인간사회의 질문입니다.

오늘 총독 빌라도와 예수님 주고받는 질문과 대답은 우문현답 아니면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에게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갑질"에 대해서 사회적 공분을 일으키고 있지만 한때는 아니 지금도 우리도 어떤 때는 "갑질"을 하며 즐기다가 반대의 경우에는 "갑질"을 당했다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자가당착이고 모순에 모순입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냐고 하는 말 속에는 당신 어떤 힘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나보다 더 세냐 아니냐 하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인간 그대로 보지 않고 그 인간이 가진 힘이 나보다 크냐, 적으냐를 저울질하면서 인간의 가치를 저울질 하고 있습니다

총독 빌라도의 첫 번째 질문에 예수님은 그 질문의 의도를 물었습니다. 당신은 나에 대해서 소문을 듣고 이런 질문을 하느냐? 아니면 당신 스스로가 궁금해서 하는 질문이냐고 되묻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목사와 교인들에 대해서 소문을 듣고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왕이다"라고 즉답을 주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소문으로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풍문으로 들은 대로 판단하거나 행동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가치를 그가 가진 힘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힘이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 굉장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는 소문을 듣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의 질문은 가치가 없습니다. 반대로 사람에 대한 자기질문을 가진 사람은 그 질문에 자기의 전부를 겁니다.

중요한 문제에 자기를 걸지 않고 소문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언제나 발뺌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천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풍문으로 듣고 믿는 자기 생명을 거는 바른 믿음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런 믿음은 산을 옮길만한 능력을 모여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서가 전하는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너희들이 나를 다른 의도로 엮고, 정치적으로 엮으려고 하는 의도를 알고 있지만 그대로 예수님의 자기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네가 왕이냐?' 그래 "내가 왕이다" 이런 대답은 위험합니다.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질문하는 사람도 그렇지만 자기 정체성에 목숨을 걸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분위기에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정체성을 숨기거나 희석시키거나 아예 모른 채 해버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기 때문에 오늘 우리 믿음에는 힘이 없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서도 "나는 나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목사입니다" "나는 장로입니다" 하면서 거기에 목숨을 걸어야 믿음의 힘이 나타날 것인데 현실의 우리는 나보다 더 큰 힘 앞에서 숙이고 맙니다.

그래서 힘이 없습니다.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자기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람은 아무 힘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나는 힘이 세다고 하는 것은 겁먹은 강아지가 이빨을 드러내고 짖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것은 힘을 쓸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질문이 연달아 나옵니다.

힘의 논리로 사는 인간은 또 묻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어느 나라 왕이냐?

너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가? 네가 가진 힘은 무엇이냐? 이 질문 속에는 세속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권력의 속성, 권력 지향적, 힘의 논리로 모든 인간과 일들을 처리하는 힘이 있지만 그러나 상대방에 대한 야비하면서도 집요하고 가장 현실적인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나라, 두 왕국론으로 대답을 대신합니다.

헷갈리고 애매한 대답입니다. 오해가 많은 대답입니다. 대답을 피하는 대답입니다. 이해가 안 되는 대답입니다.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나 많은 사람들이 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역사적으로 복잡한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당시 세계의 유일한 패권국가인 로마제국의 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힘 있는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유대 땅에 임금도 있었고 종교지도자로 힘을 가진 제사장도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총독이 지배를 받는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여기에는 두 나라가 있을 수 없고 두 임근, 두 권력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힘을 가진 로마제국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애매한 대답은 교회역사에 많은 논쟁을 낳았습니다. 그렇게 헷갈린 사람 중에 종교개혁자 루터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으로 보인 그의 두 왕국신학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와 이 땅의 나라, 영적권위와 권력과 세속적 권위와 권력, 교회와 정부의 분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때론 교회가 세속 위에서 지배하기도 했고 또 둘이 사이좋게 함께 지배하기도 했고 그 반대로 서로 힘의 우위를 놓고 싸우던 때도 많았습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교회와 정부의 함리적 지배와 상호존중을 꾀했으나 여전히 힘의 축은 세속권력에 휘둘려 왔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루터에게서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났습니다.

'두 왕국론에 모순되는 영지교회(Territoralkiche)제도'라는 소제목을 부칠 수밖에 없는 (김균진, 루터의 종교개혁. 606이하) 루터의 두 왕국론은 영지교회제도를 수용함으로써 종국에는 "교회가 제도적으로 제후의 세속 통치권 아래 있음을 말한다" (위의 책. 613)고 보았습니다.

교회가 고유한 영적권한(영적왕국)을 향유한다고 했지만 히틀러의 나치통치에서 보듯이 교회의 영적영역도 결국에는 세속통치권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의 짦은 교회역사에서도 일어났던 일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두 왕국론이 지니고 있는 모순이자 현실이었습니다.

교회의 힘은 세속적 힘을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교회가 영적왕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를 보호해 주는 그 어떤 힘이라도 내던지고 오직 하나님의 손에 그 생명을 맡기고 예언자적 모험을 감행해야 합니다.

예언자 엘리야까지도 때로는 무너지기도 했던 이런 희생을 누가 감히 나서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바울도 위에 있는 권세의 현실적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로마서 13:1-7 참조)

대답이 애매하기는 했습니다마는 실권을 뺏긴 임금은 임금이 아니듯이 대답에도 힘이 없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힘이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종류의 것이라고 힘이 없는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합니다. 사람다운 대접은커녕 사람다운 취급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현실은 동서고금에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런 현실은 동서고금에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이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총독 빌라도의 두 번째 질문은 우리의 얄팍한 처세술에 불과한 것입니다. 총독 빌라도는 이 애매한 대답을 듣고 헷갈렸습니다. 자기 앞에 죄수의 몸으로 서 있는 이 사람은 힘이 없어 보입니다. 자기왕국도 없고 자기 백성도 없고 오히려 적들이 더 많은 이 사람을 무시해도 좋게 보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교회와 교회제도와 그 권력자들 앞에서 가장 힘없는 존재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말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교, 나의 구속자요, 세상의 구세주요,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님이라고 입만 열면 외치지만 현실문제에 부딪혀서는 예수님은 가장 먼저 무시되고 있습니다.

종교권력을 가진 제도권의 사람들은 그 종교의 종류를 떠나서 이렇지 않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요?

총독 빌라도는 그러기에 세 번째 질문을 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말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진리냐?'

진리라는 단어는 희랍어로 "알래떼이야"로 썼습니다.

E. Haenchen은 그의 요한복음주석에서 여기에 쓰인 진리라는 단어는 독일어로 Wirklichkeit (Reality) 읽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했습니다.

"서구의 몰락"을 쓴 Oaswald Sprengler가 이렇게 번역하고 이렇게 읽어야 한다고 주장 했습니다(E. Haenchen. John. vol Ⅱ.180쪽 참조).

총독 빌라도에게는 현실적인 힘의 실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그 삶이 전부였습니다.

힘과 지위를 쫓아 사는 사람은 항상 현실적인 실체가 무엇인가? 현실적으로 누구에게 힘이 있는가? 하는 것이 제일 중요했습니다.

거기 줄을 서야 산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걸 못하는 사람이 바보입니다.

총독 빌라도는 혹시나 하는 마음인지, 항상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인지 예수님에게도 그런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는 제일 중요하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위의 책)

진리를 따라 산다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총독 빌라도의 질문과 그 삶의 모습은 표본적입니다. 현실적으로 누가 힘을 가지 실체인가를 따라 살지 예수 믿고 예수 따라 산다는 것은 한갓 구호 일뿐인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래저래 가장 힘없는 예수님입니다.

아무 힘도 없으신 예수님. 자기 자신의 목숨 줄조차도 건지지 못하는 힘없는 예수님입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는 우리들마저 외면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여기에 감추어져 있는 참된 진리/현실적 실체가 있습니다.

진리란 그냥 보아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읽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란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아무 힘도 없는 예수님은 실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실체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이루신 예수님이지 않습니ᄁᆞ? 십자가 사건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총독 빌라도의 세 번째 질문은 질문으로 끝났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없습니다. 실망이 몰려옵니다. 원망이 몰려옵니다. 비판이 몰려옵니다. 대답 없는 대답은 더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음악가 슈만의 피아노 곡 '트로메라이(Traumrei)'를 들은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피아노 소리와 소리 사이에 끊긴 음절 사이에 피아노 소리는 없지만 그 여운의 소리 없는 소리를 들어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왜 예수님의 세 번째 대답은 복음서에 없는지를...

우리가 그 대답을 듣고 해야 할 우리의 몫으로 남겨두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먼저 우리는 이 대답 없는 대답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그 들은 대답을 예수님의 대답으로 대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힘없는 예수님은 이 질문의 대답을 그 존재자체로 했습니다. 그것이 그 다음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 결과는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이것이 총독 빌라도가 던진 세 번째 질문에 왜 예수님은 대답대신에 침묵을 대답으로 남겼는지를 알려주는 대답 아닌 대답입니다. 십자가는 지금은 인가가 없습니다. 더구나 그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허울 좋은 구호 일뿐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십자가 뒤에는 죽음이 먼저 있기 때문입니다. 죽지도 않았는데 어찌 부활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부활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한다면 그것은 헛소리입니다.

우리는 이쯤에서 노자의 도덕경 전편에 흐르고 있는 "무위(無爲)" 사상과 행위의 사람을 볼 수는 없을까요?

저는 노자의 사상을 풀어나갈 형편이 아닙니다. 대신에 몇 문장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칠까 합니다.

도덕경

47장: 불출호(不出戶), 지천하(知天下); 불규유(不窺窬), 견천도(見天道)

문 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고, 창문으로 엿보지 않고도 천도를 본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이렇게 풀었습니다. 그러니, '나'를 떠나서(예수님의 말씀), 이 말은 곧 도의 문 밖을 나선다는 말인데, 나를 떠나 가지고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아무리 많이 알아봤자 그래 가지고는 안다고 해도 사실은 모르는 거라 (노자 이야기, 456이하)

63장: 위무위(爲無爲), 사무사(事無事)

...이런 까닭에 성인은 결코 큰일을 하지 않으니 그래서 큰일을 이루는 것이다.(위의 책. 580)

8장: 상천약수(上善若水)

"최고의 신은 물과 같다는 말인가요? 그렇지 그런 말이지.(위의 책. 121)

...뱀의 머리가 될지언정 용의 꼬리는 되지 않게(위의 책. 123)...해 달라는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반 예수님적인지 우리는 알고나 있을까요?

7장: 천장지구(天長地久)

...천지가 장구(영원)한 까닭은 그 생(生)을 자기의 것으로 삼지 않기 때문인데, 그래서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위의 책. 111)

노자의 무위(無爲)사상에는 가장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행동이 깔려있습니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행동하지 않는 것에서 원초적으로 행동하고, 존재라는 것에서 존재완ㄴ 다른 방식으로 있는 원초적인 존재인 무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무위의 행함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너무 바쁘게 행동하고, 너무 많이 가지고, 너무 큰 힘을 욕심내요, 너무 보이는 것만 찾아서 더욱 바쁘고, 불안하고, 또 생명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방식과 행동양식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으니 힘없는 예수님으로서는 오늘도 우리를 말없이 보시기만 할 뿐입니다.

그 서글픈 예수님의 눈동자와 마음을 우리까지도 외면하고 넓고 좋은 길만 찾아 떠나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힘없는 예수님은 이런 우리가 살아가고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현실세계에서 실체적으로 그랬기 때문에 영원한 힘을 가지고 영원한 일을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반대로 소원하고, 그 반대로 삽니다.

너도 나도 힘 있는 교회, 힘 있는 목사, 힘있는 장로, 힘있는 종교인이 되고 싶은 것이 현실적으로는 실체입니다. 실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실체가 아닙니다. 더 이상 아닙니다.

이러고도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면 더 이상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늘 교회뿐만 아니라 소위 말하는 종교 성직자와 그 주변에서 권력을 나누어 힘깨나 쓰는 사람들은 모두 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고 삽니다. 부와 지위, 명예와 인기, 향락과 오락, 거짓과 허상으로 가림 막 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들을 대신하여 총독 빌라도는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실패한 사람들의 변명에 불과하다고 치부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힘없는 사람들은 어디로 가나 힘없는 사람으로 밀려납니다.

예수님은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힘없는 사람들의 진정한 동행자가 되어 주십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11월 25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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