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daily.co.kr
2018.11.17 (토)

[김고광 설교] "교회의 개혁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난 1년"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 (press@cdaily.co.kr)

입력 2018. 10. 24 02:10  |  수정 2018. 10. 24 02:10

Print Print 글자 크기 + -

요한복음 5:17

수표교교회 김고광 원로목사.
수표교교회 김고광 원로목사.

오늘 설교의 제목은 1543년에 장 깔뱅이 독일의 신성로마제국황제 Karl 5세에 보낸 편지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래서 제목에 따옴표를 붙였습니다. 그리고 부제는 그렇게 요란스럽게 맞이했던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내고 난 뒤에 한국교회는 무엇이 얼마나 개혁되었는가를 생각하자는 내용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로마제국의 전통을 이어받은 신성로마제국, 독일의 황제였던 젊은 칼 5세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교회의 개혁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들의 부활이나 이런 종류의 다른 기적들처럼 인간의 희망과 생각과는 무관합니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의 선한 뜻이라 시국의 변화를 기대해서는 안 도비니다. 그보다 우리는 절망을 돌파하면서 전진해야 합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묻지 맙시다“(바르트, 신학묵상, 723쪽에서 재인용)

오늘은 종교개혁 501주년 기념 주일을 한주일 앞두고 있습니다. 바르트는 칼빈의 이 정신을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종교개혁은 조롱거리가 아닙니다.”(위의 책, 721쪽)

그런데 우리 한국과 한국교회의 현실에서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이 사회의 조롱거리가 되고 종교개혁은 한국교회에서 조롱거리처럼 된지 오래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1년 전 요란했던 종교개혁 500주년은 한국교회의 기억은 잊어버린 웃음거리처럼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또 언제쯤 이런 현상이 시작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지금의 한국교회는 사람들의 자랑거리이기 보다는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는 아프고 슬픈 현실입니다.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고 또 여러 해결책들이 논의되기도 했지만 종교개혁 500주년이라는 역사적인 해가 지나감과 함께 한국교회의 개혁의 일도 사라지고 있지 않는지 걱정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한국교회에서 종교개혁 당시의 교황 Leo 10세와 같은 사람은 사라졌습니까?

레오 10세의 본명은 지오바니 데 메디치(Giovanni dei Medici)입니다. 소위 말하는 서구의 르네상스운동을 불러일으키고 가장 많이 지원한 것으로 더 유명한 이태리 피렌체의 메디치가문의 아들입니다. 그는 1475년 12월에 태어나서 아버지의 부와 권력, 그리고 그 명성과 정치수완의 혜택을 마음껏 누리고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17세 때에 아버지의 힘으로 교황청의 추기경에 선출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성직자의 수업과 수행의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온갖 세속적인 향락과 정치적 권모술수를 배우고 즐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4년 전 지오바니가 38살 되는 1513년 3월 9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물론 그는 그때까지 신학수업과 성직자의 훈련은 물론 신부로서의 서품조차도 받지 않았던 때입니다. 그는 가문의 부와 권력의 후원으로 향락을 즐겼고, 추기경으로서의 당시 유럽의 정치를 주도 하는 교황청의 세속정치와 교회정치, 그 권모술수를 배우고 익히고 행사하며 자랐습니다. 그는 교황으로 선출된 지 6일 후인 1513년 3월 15일에 부랴사랴 사제서품을 받았고 이틀 후인 3월 17일에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또 이틀 후인 3월 19일에 공식으로 교황직에 올라 레오 10세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권력과 부, 교회세습의 전형적인 타입 이며 대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세로 접어들면서 교회가 더욱 사유화 되고 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린 채 과거의 망령인 로마제국의 뒤를 이어받은 신성로마제국의 잔해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크고 작은 성직매매가 공공연했고, 성직자의 도덕적 타락과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탐욕이 만연했습니다. 교회의 외형은 대형화되고 그 장식은 화려했으며, 순진한 교인들을 이런저런 식으로 기만하고 돈과 권력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모습은 500년 전의 교회현실만은 아닙니다.

오늘 한국교회에는 이런 종류의 성직자 아닌 성직자들은 없을까요? 겉으로 보이는 교황은 기독교신앙과 교회를 대표하는 최고의 성직자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모습과 보이지 않는 모습은 하늘과 땅의 차이와도 같은 모습입니다. 오늘도 겉으로 드러나는 목사들의 모습은 교황 이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목사의 참된 모습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정신의 모습입니다. 정신이 바로 선 성직자라면 그의 모습이 아무리 작고 초라하게 보여도 세상에 당당한 예언자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보이는 겉으로 아무리 거룩하고, 크고 화려하게 보일지라도 그 정신이 성직자의 모습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회칠한 무덤(마태 23: 27)“일 뿐입니다.

소위 말하는 칼빈의 정신을 이어받고 그 믿음의 후손들인 장로교회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한국교회에서 “개혁교회는 언제나 개혁 한다”는 구호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교회의 개혁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확신하고 목회하는 사람들이 지금 이렇게 많은 성직자들 속에서 개혁을 위한 예언자적인 성직자의 모습은 쉽게 찾을 수 있습니까?

지금은 때 묻지 않다고 하더라도 나이가 들고, 자리가 튼튼해지고, 위상이 올라가고, 돈이 쌓이고, 주위에서 부추기고, 권력과 정치의 맛을 보고, 또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될 때에라도 하나님의 일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눈이 멀지 않고 사람의 말인지 하나님의 음성인지를 가려낼 수 있고,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목회야 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확신하고 지켜나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교회의 목회에 도움이 되지는 못하고 오히려 교회정치권력을 교단의 이름으로 마음대로 우롱하고 지배하는 현대판 교황과 교황청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가족의 이름으로 뭉쳐진 교회사유화와 자기 왕국화를 ‘꿩 잡는게 매’라고 합리화할 수 있습니까?

메디치 가문이 중세 르네상스의 화려한 문화후원자라는 명분아래 그들이 자행한 무자비한 권력욕, 끝없는 육체적 탈선행위, 물질만능주의, 그리고 밖으로 드러난 위대한 업적들 아래 감춰진 불 신앙적이고 비도덕적이고, 실제적인 무신론적인 행위들이 용서받고 오히려 르네상스의 화려한 예술업적을 이룬 위대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한국교회에 현대판 로마교황청과 교황들은 없으며 그에 대한추종자들이 없다고 말 할 수 있습니까? 있었다면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난 오늘 무엇이 달라지고 있습니까?

오늘의 한국교회에는 루터와 칼빈 같은 신학자들 보다는 교황청신학의 대변인 노릇을 했던 카예탄이나 알레안드로, 그리고 요하네스 에크와 같은 신학자들이 더 많지는 않습니까?

당시에 팔았던 소위 말하는 ‘면죄부’와 ‘면벌부’를 제대로 구별하지도 않고 구별할 수 도 없고 구별했어도 말도 하지 않는 신학자들은 오늘 한국교회에는 없을까요? 교회권력의 그 잘못된 신앙과 신학을 눈감아 주고 오히려 옹호하고 신학적, 성경적 뒤받침을 해 주었던 시학자 카예탄, 안레안드로나 에크와 같은 신학자들은 오늘 한국교회에는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웨슬리목사는 1744년에 옥스퍼드대학에서 “성경적인 기독교(Scriptural Christianity)”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당시의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에게 날카로운 비판과 질문들을 던졌습니다. 이후로 웨슬리목사는 다시는 옥스퍼드대학에 설교자로 초청받지 못했습니다.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의 사명에 대한 웨슬리의 지적은 그들의 마음을 되돌려놓기보다는 오히려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말았습니다(웨슬리 설교전집 1권 86쪽 이하 참조)

오늘 한국교회를 위해서 가장 날카로운 진리의 잣대를 가지고 교회를 진리로 바르게 인도하고 지도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신학자들은 얼마나 있을까요? 루터와 칼빈, 웨슬리와 같은 신학교수는 한국교회에서는 일어날 수 없을까요?

천주교회에는 ‘면죄부’라는 단어는 없다고 하는데, 그것은 ‘Indulgentia’라는 단어의 번역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런 점을 지적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신학자는 없을까요? ‘면죄’와 ‘면벌’이 다르다고 변호하지만 죄의 용서 없이도 그 죄의 결과로 내려진 ‘벌’을 사면해 준다는 것은 논리의 착각일 뿐입니다.

신학자들이 진리의 파수꾼과 예언자적인 사명을 망각하거나 팔아버렸다면 그런 신학자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비진리가 진리를 이기도록 돕는 결과를 낳을 뿐입니다. 벌을 사면할 때는 그가 벌을 받은 원인인 죄도 함께 사면되는 것이 통례라는 것을 정말 모르는 신학자들이 있을까요?

오늘 한국교회에도 이런 식의 일들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종류의 비성서적인 것들이 성경의 진리처럼 왜곡하고, 현대판 면죄부를 파는 행태, 진리보다는 현실교회의 힘을 더 옹호하는 종교개혁 당시의 카예탄, 알레안드로, 에크와 같은 종류의 신학자들은 없는지 우리 스스로가 되묻고 또 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면죄부나 면벌부와 같은 대사면과 싸구려 은혜를 파는 것은 대단한 지위와 권위라고 여기고 그것들을 자랑스럽게 선전했던 테첼과 같은 목사나 설교자는 없을까요? 그런 것에 대해서 “아니다”라고 외쳤던 루터와 칼빈, 웨슬리와 같은 목사, 설교자는 없을까요?

루터는 후일 이때의 일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테첼은 정말로 엄청난 것을 생각해냈습니다...만일 누군가 성모 마리아를 임신시켰다고 해도, 자신은 그의 죄를 사할 수 있다고 했고, 미래에 지을 죄를 용서해 준다는 약속도 했습니다...”(라인하르트, 루터, 106쪽 재인용)

한국교회에도 수많은 예배에서 수많은 설교들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설교자들 속에 테첼과 같은 설교자들은 없을까요? 또한 그들의 수많은 설교 중에서 테첼이 면죄부 판매 때에 했던 종류의 설교내용들은 없을까요? 교회를 위해서, 목회를 위해서라고 말은 하면서도 사실은 그렇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설교자들은 없을까요?

어떻게 하든지 면죄부를 많이 팔아서 자신은 물론 관계된 이런 저런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주는 것이 목적인 설교자들은 없을까요? 순진하고, 신앙심이 깊은 가난한 사람들이 이런 설교를 듣고서 아무 의심도 없이 돈을 내고 면죄부를 사면서 마음의 위로와 죄책감을 벗어버리는 그 착한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 테첼과 같은 설교자는 없을까요?

당시 대부분의 회중들은 테첼의 판매설교를 가려서 들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런 순진한 회중들을 테첼의 설교를 과연 하나님의 말씀, 그런 일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설교자가 이쯤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예언자가 아니라 자기 수입을 늘리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장사꾼이나 종교 사기꾼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설교자들에게 일말의 양심을 기대하는 것은 사치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모두가 어쩌면 이런 사람들과 똑 같다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 모두가 이런 짓을 하나님의 일, 교회의 일, 목회의 일, 진리의 일이라고 착각하고 이런 일에 열심과 최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경쟁적으로 더 잘 하고, 더 많이 하려고 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루터와 칼빈, 그리고 웨슬리 같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때 그들이 하는 것들이나, 오늘 우리 하는 것들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하지도 않고, 한술 더 떠서 그것들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강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데 그날이 바로 안식일이라는 데서 시작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왜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느냐? 이런 것은 안식일 계명을 어기는 잘못된 일이라고 합니다.

에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새번역)”. “내 아버지께서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일하신다. 그래서 나도 일한다(메시지 번역)”. 여기서 우리는 새삼스럽게 하나님의 일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일하시는가? 하는 평범한 질문, 그러나 중요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 질문을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우리 자신들에게 꼭 같이 묻고 또 묻습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가? 이런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식일에도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일은 무엇일까요?

오늘의 말씀처럼 생명을 살리고 사랑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안식일에도 쉬지 않는 하나님의 일은 생명을 살리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들 하나님도 그 일은 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일생을 바쳐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아들 하나님은 생명을 살리고 사랑하는 일에 그 생명을 걸었고 또 바쳤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일을 바로 이렇게 하라고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창조를 이은 섭리론에 입각해서 하나님의 일은 계속해야 된다고 하십니다. (이 본문을 이렇게 보는 것이 성서학자들 대부분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개신교 쪽으로: Barth. 교회교의학 Ⅲ/3. 23쪽 이하. 천주교 쪽으로: R. E. Brown. John. Vol.Ⅰ, 217쪽 이하 참조).

여기서 우리가 했고 또 하고 있고, 우리 뒤를 이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사명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묻고 도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일이라고 스스로 자부하고 또 성공했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일이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일 아닌 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포장한 적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서도 사실은 우리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자신도, 교회 교인도, 세상 사람들을 속인 적이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가 하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강변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우리의 일에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하는 일들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더욱 확신하였습니다.

과연 내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까? 내가 목사로서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일입니까? 과연 내가 하는 모든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일입니까?

종교개혁자 칼빈은 “교회의 개혁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개혁해야 할 일은 많습니다. 그 중에서 목사 된 우리 스스로가 개혁해야 할일이 제일 시급하고 중요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이 일이 과연 하나님의 일인지 아닌지를 스스로에게 깊이 물어야 합니다. 철저히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더 나아가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의 일을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는가?

그런데 우리는 이런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런 것을 물으나 마나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데 그런 것을 묻긴 왜 묻느냐고 큰소리치면서 말입니다.

종교개혁 시대의 교황청의 교회와 세상의 정치 권력자들이나, 진리를 파수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눈감아 주고, 변명해 주었던 카예탄, 알레안드로, 에크와 같은 신학자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더 많은 며뇌부를 팔아서 돈을 많이 모우기만 하면 된다고 외치던 테첼과 같은 설교자들은 오늘 한국교회에는 없습니까?

그래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고 또 이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하게 넘어가고 있습니까? 한국교회에는, 우리 교회에는, 나의 목회에는, 설교자인 나 자신에게는 개혁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까?

반대로 우리는 아직도 우리는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교회를 위한 것, 목회를 위한 것, 교인들의 구원을 위한 것,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하나님의 일 아닌 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우리면서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해서 우리는 어느 정도의 성공을 했습니다.

이렇게 성공했는데 누가 나를 개혁해야 한다고 할 수 있는가? 내 목회에, 내 설교에 무엇을 개혁해야 한다고 하는가? 우리 교회에 무엇을 개혁할 것이 있는가?

이렇게 크게 성장하고 성공하고 이 정도로 일했는데 누가 감히 나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는가 하고 큰소리 치고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또 다른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듣습니다.

개혁자 루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중세 독일 신비주의 영성의 대가이며 설교자였던 마에스터 에크하르트가 있습니다. 그런 에크하르트에 깊은 영감을 주었던 중세의 신비주의자이면서 시인인 Angelus Silesius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Ohne warumb
Die Ros’ ist ohn warumb / sie bluehet weil sir bluehet / Sie achtt nicht ljrer selbst / fragt nicht ob man sie sihet.
(Angelus Silesius. Cherubinischer wandersmann. #289. 69쪽)

이유도 없이(Without Why)
장미는 이유가 없네 /장미는 꽃을 피워야하기에 피운다네/ 장미는 스스로를 위해 일(꽃을 피우는 행위)하지 않고 / 사람이 보아주는지 묻지도 않는다네 /

하이데거는 실레시우스가 물은 “이유(Warum)”를 “근거(Grund)”, 존재의 근거로 보았습니다.(Der Satz vom Grund) 그런 면에서는 에크하르트가 선구자였습니다(John Caputo. The Mystical Element in Heidegger’s Thought. 100쪽 이하참조) 그는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하나님은 내 근거의 근거입니다. 그리고 나의 근거는 하나님의 근거입니다... 당신은 왜라고 묻지 않고 이 가장 깊은 근거에 의해서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John Caputo. 위의 책. 100쪽 재인용)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왜? 무엇을 위하여? 하느냐 하고 물으면 우리는 무엇이라 대답할까요?

하나님 앞에서 사탄은 이렇게 묻습니다. “욥이,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욥1:9) 사탄의 이 질문은 우리가 일하는 이유와 근거, 그리고 목적에는 무언인가를 바라면서 한다는 대답이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일에도 바라는 것이 있다,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릭 하나님의 일이라고 해 온 일들이 모두가 하나님의 일이라고 우기기도 힘듭니다. 그런데 거기에도 이유가 있었고, 바라는 것이 있었다면 더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아무 이유 없이 일했다고 당당히 고백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나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나는 아무 이유 없이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내가 행하는 모든 일이나 말들은 하나님에게만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만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순수한 신앙이겠습니까? 불행이도 우리는/나는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럴 용기도 없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 아닌 것을 하나님의 일로 가장했던 적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일 아닌 것을 하나님의 일이리고 우긴 적이 많습니다. 그나마도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이유가 많았고, 숨겨진 다른 목적이 많았고, 무언가 대가를 바라는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우리 자신, 우리의 목회, 우리의 교회를 개혁하는 일이야 말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가장 필요하고 시급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떠들썩하게 기념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예전 그대로 살고 있는 우리를 직시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교회 개혁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10월 21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임을 밝힙니다.

관련기사

Print Print 글자 크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