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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4 (수)

기독교는 가짜 신비주의를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 (press@cdaily.co.kr)

입력 2018. 02. 17 07:59  |  수정 2018. 02. 17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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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신학연구소장 조덕영 박사, "분별을 위한 몇 가지 도구는…"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기독교가 하나님의 계시(성경)에 기반 한 신비한 종교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신비를 추구하는 신비주의는 주관적 요소가 개입하면서 개인의 초월적 누미노제한 체험을 통해 바른 성경관과 계시에서 이탈하여 주관적 체험으로 흐를 위험성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교회는 바른 체험과 성경과 다른 신비 체험을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 기독교 신비주의 역사 속에서 교회는 신비 체험에 대해 다음의 몇 가지 분별의 도구를 도출해 낼 수 있다고 본다.

첫째 성경의 중요성

신비 체험이 성경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경험이어야 한다(성경론). 개인의 체험이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 창조, 타락, 구속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근본적 틀을 허무는 작은 여우(아 2:15)가 되지 말아야 한다. 즉 개인의 주관적 체험이 성경과 어긋나서 자신과 이웃의 신앙의 근간을 허무는 일이 없어야 한다.

둘째 기독론과 관련하여

성경적 기독론을 훼손하는 체험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 대한 복음적 기독교 교리에 탈선을 일으키는 신비적 체험은 조심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기독론에 대한 도전은 성경에 대한 훼손이요 믿음의 반역이다. 과거 한국에서 천국 체험 간증이 대유행했던 일이 있었다. 어떤 자칭 선교사(물론 나중에 알고 보니 가짜였다)는 천국에 가 보니 예수님께서 성도들이 머물 맨션을 열심히 건축하고 있음을 목격했고 자신은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와 댄스를 추었다는 황당한 체험 수기를 책으로 내어 한국 신자들을 현혹한 적이 있다. 은혜는 커녕 심각한 신성 모독의 책이었다. 이런 신비 체험에 절대 속지 말아야 한다. 삼위일체 제 2위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왜곡된 믿음을 주입하는 것은 신비주의자들이 자주 범하는 왜곡이다. 이것은 신성모독인 것이다.

셋째 교회 역사의 중요성

어떤 신비 체험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수용 가능했던 신비 현상이나 체험이었는 가를 검증하는 일은 매우 아주 중요하다(교회사와 교리사). 기독교 역사는 많은 신비적 현상과 개인적 체험들에 대해 그 진위를 평가하여 왔다. 개인의 신비 체험이 이 역사적 평가의 기준들을 넘어가게 될 때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불순한 체험일 개연성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교회의 소위 “금가루 현상”이나 “금이빨 소동”에 대해 개혁신학자 서철원 박사(전 총신대 신대원장)가 기독교 역사상 그런 신앙적 체험은 없었다고 단언한 것을 주목하라. 완전한 희고 예쁜 이빨이 아닌 하나님께서 치과 의사들이나 하는 그런 불완전한 금이빨을 왜 주시는가? 그건 신앙의 모조품이요 짝퉁 신비 곧 종교적 신비주의에 불과하지 정통 기독교는 전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나타난 적이 없던 엉뚱하고 새로운 신비 체험(보기 일명 “토론토 축복” 등)이 나타나면 검증이 필요한 이유다.

넷째 성경 기본(핵심) 교리와 내용을 첨삭하면 안 된다(계 22:18)

신비 체험이 성경의 틀을 벗어난 첨삭된 특별 계시적 체험이 아닌지 검증해야 한다(계시론). 인류를 믿음으로 인도하고 구원에 이르는 근본적 계시(특별 계시)는 성경 속에서 이미 모두 완성된 것이다. 신비 체험이 이 계시의 영역을 넘어 새로운 특별 계시를 들고 나온다면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닌 것이다. 새로운 구주, 새로운 성경(몰몬경, 통일교 교리 등), 새로운 계시의 첨삭은 결단코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낯선 신학 용어는 반드시 신학적 평가를 받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경이나 정통 교리보다 신비적 감정이나 체험이 앞서거나 기타 교리적 논쟁과 혼동을 일으킬 수 있는 낯선 단어를 분별없이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살펴보아야 한다. 성경은 은사를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들뜬 감정이나 흥분 같은 은사가 다가 아니다. 은사는 반드시 성경과 그 열매로 판단 받아야 한다. 또한 신비 체험이 새로운 낯선 단어들을 창출해내는 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수 있는 게 아니다(벧후 1:20). 교회는 성경과 더불어 역사 속에서 새로운 신학적 용어에 대해 치열한 논쟁과 토의를 거쳐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교리를 구성하여 왔다. 비록 과학과 기술의 발달 속에서 다양한 단어들이 탄생하였더라도 이것들을 새로운 신학적, 교리적 용어로 활용하는 것은 극히 조심해야 한다.

따라서 마리아의 염색체와 DNA, 예수의 염색체 숫자, 마리아의 월경, 왕의 기도, 신사도, 빈야드 운동, 구도자 위주의 열린 예배(열린 교회가 아님), 제 2 선민론, 제 2 히브리민족 등과 같은 성경적으로 전혀 의미가 없는 낯선 단어들이 신비주의와 결합할 때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닌 불순한 폭발력을 가지게 될 수 있다. 따라서 신학 전개에 있어 낯선 용어의 사용은 성령의 사람들 가운데 치열한 신학적 논증 속에서 달궈져서 그 진위를 평가 받은 다음 정금같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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