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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3 (토)

[강대인 설교] “예수 오심, 기쁨인가? 고통인가?"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 (press@cdaily.co.kr)

입력 2018. 12. 11 06:15  |  수정 2018. 12. 11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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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일과 말3:1-4, 빌 1:3-11, 눅 3:1-6 | 본문 마10:34

강대인 장로
강대인 교수

0. 성서일과 :

1) 누가복음 1:68~79 사가랴의 찬가(예언)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이라고 기록하지만, 내용은 축복, 혹은 찬양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특히 76절 이하에서는 새로 태어난 자기의 아들 요한에 대한 찬양이 이어집니다. 누가복음 1장을 통해 누가복음 기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고 주석가는 지적합니다. 첫째, 예수의 탄생을 통해 새로운 메시아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둘째, 요한은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로서 예수에게 종속된 인물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셋째, 메시아 시대는 주린 자가 배부르게 되고 부자가 빈손이 되며, 높은 자가 낮아지고 낮은 자가 높아지는 등 가치전도가 드러나는 혁명적인 변화의 시대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2) 말라기 3:1~4 정화심판과 멸망심판

주가 오실 때에 과연 누가 살아남거나 견디어 낼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 날은 아무도 감당할 수 없을 것임을 지적합니다. 마치 아모스 5:18, "주님의 날이 오기를 바라는 자들아, 왜 주님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둡고 빛이라고는 없다."는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야훼께서 오시는 날은 구원의 날이 아니고, 직접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특히 말라기는 공의의 하나님이 직접 정화심판과 멸망심판을 집행하심을 예언하면서 두 가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공동체의 회복은 지도자들의 정화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정화의 심판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예배가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한 공동체의 회복은 그 무엇보다도 지도자들의 회개에서 비롯됩니다. 둘째, 사회적 약자는 공동체의 공의성을 회복하는 척도가 됩니다. 말라기 3:5에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악행을 다섯 부류로 언급합니다. 점치는 자, 간음하는 자, 거짓으로 증언하는 자, 일꾼의 품삯을 떼어먹는 자,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고 나그네를 학대하는 자처럼, 이런 일이 일상이 되어 버린 자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다짐하십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곧 역사 속에 등장하심을 알립니다. 그 하나님은 공의를 척도로 사람들을 심판하십니다. 공의는 특별히 사회적 약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 지에 따라 측정됩니다. 약자들이 권리를 박탈당하고, 억울해 하고, 억압을 당하는 곳에서 공의가 숨 쉴 수 없습니다.

3) 누가복음 3:1~6 세례요한의 등장

세례요한의 등장과 그의 활동을 소개하는 이 본문은 이사야 40:3~5의 말씀을 칠십인 역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라는 강한 메시지가 전달됩니다. 주님의 통치는 죽음의 땅 광야, 사막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선포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불가능이라고 생각하는 그 장소에서부터 주님은 나타나셔서 행진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행진에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 모두 제거될 것입니다. 산들은 낮아지고 골짜기는 돋우어지며, 험한 길이 평탄하게 다시 만들어질 것입니다. 아무것도 주님의 행진, 주님의 오심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 세례 요한의 임무였다면, 오늘 예수의 오심을 선포하는 교회들은 어떤 메시지를 준비해야 할지를 답해야 합니다.

4) 빌립보서 1:3~11 감사와 중보기도(종말론적 그리스도인의 삶)

빌립보교회에 대한 감사와 교인들을 위한 바울의 중보기도로 이루어진 이 본문은 종말론적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강조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집니다. 특별히 9절 이하는 형식상으로는 기도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바울의 윤리적 교훈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사랑에 대해 언급하면서, 지식과 통찰력을 겸비한 완숙한 사랑의 삶을 강조합니다. 이를 토대로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순결하고 흠 없이 지내며, 의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 것을 권면합니다. 대림절에 이 말씀을 묵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의 처음 오심을 맞는 것이나 다시 오심을 맞는 삶, 모든 순간순간이 마치 종말론적 삶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읽어집니다.

오늘의 성서일과 본문들을 읽으면서 저의 생각은 예수의 오심이 기쁨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통째로 바뀌는 결단과 함께, 왜곡된 사회구조의 회복이라는 고통과 재앙을 수반하는 엄청난 메시지임을 읽게 됩니다. 너무 익숙해진, 아니 세속화된 크리스마스의 들뜬 분위기와 그저 그런 교회력의 하나처럼 치부해온 오늘 우리 교회와 사회 현실을 생각하면서, 2018년 대림절을 단순하게 기쁨으로만 맞을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에 오늘의 성서일과 외에 마태복음 10:34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을 추가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떠오른 저의 생각과 제가 이해한 말씀의 의미를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1. 기다림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리움이고 희망입니다. 또한 어떤 이에게는 설레 임이지만, 다른 이에게는 두려움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대림절은 그리스도를 그리워하면서 그를 맞을 준비를 하는 절기입니다. 아니 그가 있는 자리로 다가서는 것이고, 그가 올 길을 미리 닦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의 말과 삶을 찾아 그를 닮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설레 임으로 그 분의 오심을 맞을까, 아니면 두려움으로 그 분을 맞을까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기다림은 절절하고도 가슴 저밉니다. 조선조 시대 대표적인 규방가사의 하나인 망부가가 그러하고, 많은 시인들의 시 내용들이 그러합니다. 왜 시인들은 기다림에 대한 시가 그리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는 시인 중의 한분인 황지우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이렇습니다.

"내가 미리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 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이미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엊그제 사법농단의 협의를 받고 있는 전직 대법관이 구속을 면하게 된 사유의 하나로 꽤나 생소한 사자성어가 세인의 관심을 끌렀습니다. '의문이망倚門而望' - 중국 전국시대 제나라의 관직에 나가있는 자식이 무사히 귀가할 때까지 초조함으로 기다리는 한 어머니의 심정을 전하는 말입니다. 자식의 귀가가 더 늦어지면, 어머니는 동구 밖 마을 문에까지 나가서 하염없이 기다린다는 '의려이망(倚閭而望)'이란 말도 고사에는 이어집니다. 마치 탕자비유의 집나간 둘째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과 오버랩이 됩니다.

설레 임, 초조함, 어떤 기대, 그리고 이런 저런 생각들이 누군가를 기다릴 때, 그 속에 묻혀있음을 깨닫습니다. 대림절, 그리스도의 오심을 갈망하는 크리스마스 절기는 어떤 기다림인가요? 늘 축제의 시작이고 기쁨의 노래로 채워졌던 크리스마스 절기에 기쁨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끌어내고, 뜬금없는 고통과 재난의 메시지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메시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 복음(Εύαγγἐλιον - εύ+αγγἐλια), 기쁜, 행복한, 바른 소식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의 대군과 맞붙은 아테네의 소수병력이 마라톤광야의 전투에서 이기게 되어 그 승전소식을 전하기 위해 백리가 넘는 먼 거리를 달려가 초조하게 전투결과를 기다리던 시민들에게 전해진 한 병사의 승전보, 그것이 바로 기쁜 소식(Εύαγγἐλιον)의 참의미를 이해하는 실마리입니다. 국가의 존폐가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에 의지할 것 하나도 없는 그 순간에 전해오는 구원의 소식, 승리의 소식, 그것이 '기쁜 소식' '복음'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유앙겔리온'(Εύαγγἐλιον)의 의미입니다.

이런 언어적 배경을 전제로 하면, 기쁜 소식은 어떤 과정을 통해 참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인지를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기쁨은 두려움과 고통을 동반하고 누군가의 희생이 뒤따른다는 것이 우리가 배우는 교훈입니다.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는 누가복음 기자의 표현으로도 능히 짐작이 갑니다. 요셉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임을 전할 때, 복음서 기자가 담담하게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반문하면서 이어진 천사 가브리엘의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말씀에 순순히 그 엄청난 사건을 받아들이는 마리아를 만나게 됩니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저는 이 대목이 쉽게 넘어가지를 않습니다. 이 놀라운 소식에 마리아가 직면한,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과 공포, 혼례를 올리지 않고 아기를 낳는 여인에 대한 가혹한 유대의 전통을 이겨내는 용기, 종국에는 죽음을 각오해야하는 엄청난 무게를 그 가냘픈 여성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너무 쉽게 넘어가는 복음서 기자의 짧은 대목이 자꾸 걸립니다. 아기를 낳기까지 그 긴 시간, 그리고 태어난 아기의 장래를 생각하면서 혤 수없는 그 많은 나날을 어떻게 인고하며, 지낼 수 있었는지 쉽게 상상이가지 않습니다. 기쁨은 인간이 붙잡고 있는 이성으로는 얻을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전적으로 따르는 믿음 없이는 얻을 수 없는 선물입니다. 기쁨의 소식은 전하는 자의 은혜와 함께 받아들이는 자의 죽음까지도 각오하는 믿음과 희생이 마주칠 때만이 복음, '유앙겔리온'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기쁜 소식은 간절함이 수반되어야 성취되는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도무지 희망의 빛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의 순간을 회상해 봅시다. 어미의 눈길에 쏠린 올망졸망한 아이들의 그 큰 눈망울, 이제 더 버텨내기 힘들어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지경이 된 가난현실을 웅변해 주는 텅 빈 뒤주, 어미의 손에 쥔 동전 몇 닢, 그들에게 예배당을 통해 전해진 옥수수가루 한 포, 그것은 정말 구원의 기쁜 소식이었을 것 같습니다. 적지에 고립되어 부대원의 생사가 촌음에 달려있을 때, 쿵쿵 터져대는 아군의 지원 포 사격 소리, 그리고 이어서 날아온 아군 전투기의 굉음과 폭격소리, 그것은 분명 '유앙겔리온' 이었습니다. 어쩌면 요즘의 청년실업의 늪에서 취업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한 젊은이의 합격소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토록 우리 삶의 순간순간 경험할 수 있는 간절함, 절박함이 절정이었던 순간에 전해졌던 기쁜 소식들은 우리들 각자의 기억창고 속에 잊히지 않는 기록으로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기쁨은 고통과 절망과 함께 묶여있고, 그래서 더 남다른 의미를 찾게 됩니다.

우리의 생각을 2천 년 전 유대 땅, 그 시간과 공간으로 옮겨가 보십시오. 수 백 년 간 나라 없는 설음을 앉고 살아온 긴 세월, 여전히 거대한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는 힘없는 백성, 형식적으로 몇 개의 지역을 분할하여 통치하는 분봉 왕들의 횡포, 힘 있는 자들 편에 서서 힘없는 백성의 삶을 더 궁핍하게 하는 동족의 지도자, 힘들고 고달픈 일상을 감싸고 위로해야 할 종교지도자들의 일탈과 허세, 도무지 희망의 끈을 찾기 어려운 이들에게 과연 기쁜 소식은 무엇이었을까요? 강대한 제국의 압박으로부터의 진정한 독립과 다윗 왕국의 회복, 인간의 존엄이 무참히 짓밟히는 끈임 없는 전쟁의 종식, 거짓 평화가 아닌 참 평화의 구현, 과부와 고아, 그리고 외국인 나그네와 같은 사회적 약자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터전, 이들의 간절한 소망이 과연 이루어진다면, 그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사야 9장 6절 이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

3. 대림절에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 - 공평, 정의, 사랑의 실천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는 경제주체들 사이의 자유로운 경쟁을 중시하고 보장합니다. 그러나 개개인의 능력의 문제와 함께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복합적으로, 또는 중층적으로 결합하여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합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문제입니다. 한 연구 자료에 의하면 세계 인구의 1%가 전 세계자산의 4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가장 부유한 상위 10%가 전체자산 가치의 85%를 독점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26억 명의 사람들은 하루 2천원의 돈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그 가운데 3분의 1은 천원 미만의 돈으로 하루를 견디어 냅니다. 이런 불평등 문제는 가난한 나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불평등 문제에서 비롯된 프랑스의 노란조끼의 대규모 시위는 이번 주가 절정이 될 것 같습니다.

우리사회로 관점을 돌려보아도 여전히 암울한 현실은 비등합니다. 소득주도성장을 정책의 기조로 균형발전을 도모하려는 현 정부의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빈부격차의 문제는 여전하거나 오히려 더 심각해져갑니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성장사다리의 허리가 되어야 할 중산층이 무너지고 소득 하위계층이 상위계층으로 이동하는 길이 막혀있습니다. 이 때문에 소위 흙수저•은수저•금수저 등 현대판 신분제가 등장하고, 한탕주의가 확산되는 부작용이 속출합니다. 손수레 가득 폐지를 싣고 다니는 노인 빈곤층이나 하루 끼니를 걱정하는 결손가정의 아이들이 여전한데, 강남의 수입명품 매장은 발 디딜 틈이 없어 보입니다. 꽁꽁 얼어붙은 고용시장, 벼랑 끝에 내몰린 자영업자들의 서글픈 모습들이 우리사회의 불평등한 현실을 대변합니다. 기업도 기업 나름, 우리나라 전체기업의 0.3%인 대기업이 전체영업이익의61%를 차지하고 있다는 며칠 전 언론보도도 우리의 또 다른 현실이기도 합니다. 가진 자들의 갑 질이 사회적 이슈가 된 지는 꽤 오래되었습니다. 소위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가진 자들의 사회적, 도덕적 의무를 이야기 하지만, 여전히 우리사회는 이런 현상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지난 11월 29일 한겨레 보도는 우리도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보게 되었다고 잠시 흥분한 적이 있습니다. 재계 30위권의 코오롱그룹 이웅열 회장의 사임 뉴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덕분에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하게 살아왔지만, 그만큼 책임감의 무게도 느꼈다. 그동안 금수저를 물고 있느라 이가 다 금이 간 듯한데, 이제 그 특권도, 책임감도 내려놓는다." 우리의 기업 풍토에서 보기 힘든 놀라운 소식이라고 반겼는데, 그 감정도 잠시, 그 재벌 회장의 상속세 탈세 협의를 조사하고 있다는 검찰소식을 접하고선, 순간의 환상이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역시나 재벌의 일거수일투족은 거짓과 허위, 교묘함과 오만함을 빼고서 순수하게 읽을 수 없는 지경임을 새삼 발견할 뿐입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을 교회로 옮겨봅니다. 기독교사상 금년 12월호에는 김광수 장로님의 귀한 글이 수록되어있어 많은 분들이 읽으셨을 줄로 생각합니다. 2018년 한국교회를 돌아보며, 예수의 무덤이 '비어있음'에 주목하자는 제목의 글입니다. 교회 연합기구를 둘러싼 이합집산의 현실, 교회 내 성 추행과 성폭행 등 이어진 크고 작은 부끄러운 이야기, 사회적 비판까지 받게 된 교회 세습의 현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보낸 지 1년이 지났지만, 여전한 한국교회의 현주소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감히 말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국가권력과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감시해야할 교회와 그 지도자들은 스스로 국가의 이념적 기구의 하나가 되었고, 그런 역할이 얼마나 비성서적인 지조차 잊고 있습니다. 성서의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미가서 3:11 "이 도성의 지도자들은 뇌물을 받고서야 다스리며, 제사장들은 삯을 받고서야 율법을 가르치며, 예언자들은 돈을 받고서야 계시를 밝힌다. 그러면서도, 이런 자들은 하나같이 주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신다고 큰소리를 친다."

7:2f "이 땅에 신실한 사람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정직한 사람이라고는 볼래야 볼 수도 없다...악한 일을 하는 데는 이력이 난 사람들이다. 모두가 탐욕스러운 관리, 돈에 매수된 재판관, 사리사욕을 채우는 권력자뿐이다. 모두들 서로 공모한다."

이사야 56:11 "지도자라는 것들은 굶주린 개처럼 그렇게 먹고도 만족할 줄을 모른다. 백성을 지키는 지도자가 되어서도 분별력이 없다. 모두들 저 좋은 대로만 하고 저마다 제 배만 채운다."

아모스서 5:24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6:12 "그런데도 너희는 공의를 뒤엎어 독약을 만들고, 정의에서 거둔 열매를 쓰디쓴 소태처럼 만들었다."

이사야 28:17 "내가 공평으로 줄자를 삼고, 공의로 저울을 삼을 것이니,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한 사람은 우박이 휩쓸어가고, 속임수로 몸을 감춘 사람은 물에 떠내려 갈 것이다."

4. 예수의 오심이 참 기쁨이기 위해

대림절 예수의 오심을 알리는 기쁜 소식은 반드시 공의와 사랑의 실천이라는 값을 치루고 나서야 주어지는 선물임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의 성서일과 누가복음 3장의 말씀처럼 예수오심에 방해가 되는 왜곡되고 구부러진 것들을 바로 세우기 위한 감당키 어려운 고통을 인내하여야 합니다. 말라기 3장의 말씀처럼 정화의 심판과 멸망의 심판을 거쳐야 드디어 기쁜 소식, '유앙겔리온'을 맞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0장 34절의 말씀,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는 구절은 우리를 미혹케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산상수훈 5장 9절,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는 말씀이나, 바로 앞부분, 10장 12절의 "너희가 그 집에 들어갈 때에, 평화를 빈다고 하여라."는 말씀과도 어긋나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는 예수를 통하여 증언된 하나님의 나라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이루어진다는 메시지를 읽어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의 전제 없이 평화를 바라는 것은 잘못이고, 그런 평화는 거짓평화입니다. 참 평화를 위해서는 오신 예수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에서 시작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곳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의 말씀입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우리에게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주를 믿는 믿음으로 복음에 근거한 참 평화를 얻던지, 분열과 대결, 미움과 갈등의 현상을 마치 평화인 것처럼 위장한 거짓 평화를 붙잡을 것인지,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는 것뿐입니다. 예수의 오심은 현재적 사건이지만 동시에 종말론적 사건이기에 우리의 실존적 결단을 요구하는 두렵고 떨리는 메시지입니다.

■ 강대인 교수는 미디어시민 모임 이사장(현)으로 방송위원장, 한국방송학회장을 역임했으며 건국대 언론정보대학원장, 계명대 사회과학대 학장 등을 지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12월 9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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