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창조연대논쟁의 출발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있어 연대 논쟁은 주로 젊은 창조 연대를 지지하는 그룹에서 나왔다. 따라서 창조 연대 논쟁하면 주로 기존 우주 연대에 대한 젊은 연대 쪽에서의 도전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창조 연대 논쟁은 주로 과학의 문제로 치부되어 온 면이 있다. 하지만 논쟁 자체의 출발점이 성경이고 일부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주류 과학계에 도전하는 형태를 띠었으므로 다분히 신앙적이고 신학적이다. 따라서 이 논쟁을 위해서는 창세기 1-11장에 걸친 성경 전반부에 대한 역사적 연구와 주요 주석들에 대한 검토와 과학적 과정과 결과에 대해 폭 넓게 정통해야 한다. 특별히 창세기 1:1-2:3에 나타난 하나님 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일하시는 섭리에 대한 신앙적, 신학적 검토가 필수적이다. 이처럼 본질적으로 창세기 전반부는 “신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것은 그 동안 국내에서 창조나 창조연대 논쟁이 신학자들과의 별 소통이 없이 진행되어 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무슨 문제는 없었을까?

필자는 지금까지의 창조 연대 논쟁이 성경적, 신학적으로 볼 때 분명 문제점이 있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신학적 근거가 빈약한 논쟁은 결론에 이르기가 어려울 뿐더러 감정적 싸움으로까지 확장되기 때문에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원 연구는 계속 되어야 하지만 복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 태도로 적전(敵前)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본 논고는 창조 연대 논쟁이 벌어지게 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서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창조 연대 논쟁의 간략사(簡略史)

기독교인들은 누구나 창조론자이다. 물론 창조를 믿는 다른 종교들도 많다. 따라서 창조론 운동은 다양한 종교인들이 뛰어들 여지가 있다. 하지만 창조 연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이슈화 시킨 것은 주로 기독교 진영이었다. 교부시대로부터 종교개혁 시대까지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창조 연대 논쟁이 근래 들어와 크게 불거진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하면서 이에 동조하는 기성 과학자들은 진화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필연적으로 우주와 생명의 유지기간을 연장시켜 왔다. 다윈의 진화론 탄생을 전후하여 연대 논쟁과 관련하여 기독교 진영에는 중요한 두 가지 역사적 기록이 있다. 하나는 17세기 아일랜드 출신의 대주교 제임스 엇셔(James Ussher, 1581-1656)가 세계 창조가 기원전 4004년이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그의 독창적 계산은 아니었지만 오늘날 그는 이 주장의 상징적 인물이 되어있다. 두 번째는 간격 이론(Gap Theory)을 수용한 보수 기독교인들 사이에 권위 있는 <스코필드 참조 성경>(Scofield Reference Bible, 1909)이 나온 것이었다. 이것은 진화론의 패러다임을 수용할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이처럼 창조 연대 문제와 관련하여 신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나자 신학이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 방관만 할 수는 없었다. 프린스턴 신학교의 찰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는 조심스럽게 이 문제에 대해 검토한 후 다윈주의는 무신론의 배경이 있음을 밝혔다. 핫지의 신학적 견해는 북미 몬트리올의 존 윌리엄 도슨(John William Dawson, 1820-1899)과 프린스턴의 아놀드 귀욧(Arnold Guyot, 1806-1884) 등에게 이어졌다. 1922초에는 장로교 평신도로서 미 대통령 민주당 후보로 나섰다가 세 번 낙선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 1860-1925)에 의해 공립학교에서 진화론 교육을 금지하려는 운동이 켄터키에서 일어났다. 브라이언은 진화론의 가장 큰 문제는 과학적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자연주의와 그로 인해 나타나는 사회적 다윈주의에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그는 신앙인으로 이 문제의 중심으로 뛰어들었으며 미국 반진화론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상징적 인물만 되었을 뿐 1925년, 스콥스 재판(Scope's Trial)이 끝난 후 닷새 만의 사망으로 인해 반진화론 운동의 전면에서 바로 퇴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미국에서 시작된 반진화론운동에 주로 적극적으로 동조한 교파는 일부 루터교(미주리 종교회의 루터파), 침례교, 세대주의자들이었고 장로교, 감리교, 회중교회, 성공회 등은 비교적 방관자적 입장이었다. 당시 반진화론 진영의 대표적 인물로는 미네아폴리스 제 1 침례교 목사이자 1919년 ‘세계 기독교 근본주의 연합’(the World's Christiam Fundermentals Association)을 설립한 윌리엄 라일리(William Bell Riley, 1861-1947)와 장로교 목사요 연구과학기관(Research Science Bureau)을 설립한 해리 림머(Harry Rimmer, 1890-1952)가 있다. 문제는 반 진화론 진영이 연대 문제에 있어 통일을 이루지 못한 점이었다. 귀욧과 도슨과 브라이언과 라일리는 창조의 날들을 시대(ages)로 보는 반면 해리 림머는 간격 이론을 선호하였다. 심지어 찰스 핫지의 뒤를 이은 강력한 성경무오론자요 프린스턴의 개혁신학자였던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 1851-1921)는 오히려 핫지와 반대로 진화론을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안식교 신자 프라이스의 역할

이 같은 창조론 진영의 연대 논쟁에 쐐기를 박는 인물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선두 주자는 캐나다 동부의 작은 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제 7일 안식교 신자인 조지 맥크리디 프라이스(George McCready Price, 1870-1963)였다. 그는 정통 지질학을 배우진 않았으나 독학으로 격변론적인 대홍수 지질학을 구축하였다. 물론 그의 견해는 노아 홍수가 진화론자들의 근거가 되는 화석 기록을 설명한다는 안식교 선지자 엘렌 지 화잇(Ellen G. White)의 영감을 충실히 따르기 위한 결단으로부터 시작한 것이었다.

프라이스는 지질학을 연구하면서 1923년에 절정에 달했던 창조론의 몇몇 결과물을 <새로운 지질학>(The New Geology)이라는 책으로 발간했다. 이 책은 창세기의 첫 부분에 대한 “단순한” 혹은 “문자적” 해석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6,000-8,000년 전에 창조하셨고 지구의 지질학적 과거를 형성하기 위해 대홍수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프라이스는 이전에 훈련이나 현장 경험이 전혀 없었던 독학 지질학자였다. 그는 신앙적 열정에 기초하여 태고의 지구의 모습을 알려 주는 지질학적 단층과 여러 증거들에 대한 기존의 이론을 공격했다. 물론 전문 지질학자들은 프라이스의 생각을 전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프라이스의 생각은 안식교 모임 밖에서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하지만 어떤 경우이든 그는 20세기에 등장한 <창조과학> 운동의 원조임은 분명했다.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루터 교회의 미주리 회의였다. 미주리 회의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다른 종교적인 질문들은 제 7일 예수 안식교의 그것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지만, 현대 세계를 열정적으로 비판했던 몇몇 사람들은 프라이스의 성서적 문자주의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때 쯤 드디어 젊은 연대 논쟁의 상징적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남 침례교 배경의 수력공학자였던 헨리 모리스(Henry M. Morris, 1918-2006)였다.

<창조과학> 운동의 원조, 헨리 모리스의 등장

프라이스를 제외한다면 헨리 모리스는 <창조과학> 운동의 원조라고 불릴만한 인물이다. 그는 신앙으로서의 안식교에는 동조하지 않았으나 프라이스의 책에 감명을 받고 창조론 운동에 뛰어 들었고 창조론 운동이 젊은 창조 연대로 방향을 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처음에 그는 보수적 복음주의 과학자들이 1941년에 설립한 미국과학자연맹(American Scientific Affiliation, ASA)에 참여하였다. 모리스는 ASA가 성경의 권위에 대해 확고한 견해를 고수하며 자연 세계 위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옹호했지만, 이곳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오랜 연대(날-시대 이론 혹은 단절 이론)를 따른 다는 것을 알고, ASA와 결별하였다.

조직신학자 버나드 램의 입장

그런데 1950년대 들어 새로운 인물이 한 사람 등장한다. 복음주의 침례교 신학자인 버나드 램(Bernard Ramm)은 1954년, <과학과 성경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The Christian View of Science and Scripture)이라는 책을 발간한다. 이 책은 자연의 증거와 성경의 이해를 화해시킬 수 있는 좀 더 유연한 접근 방법을 제안했기 때문에 ASA 구성원들의 환영을 받았다. 램은 근본주의자들이 적절한 문화적 상황 안에서 성경을 읽지 못하고 17세기 베이컨 시대의 본문인 것처럼 성경을 읽고 있다고 비난했다. “지나친 교조주의의 가장 심각한 오류는 조화에 방법이 있다는 점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의 언어와 그 언어에 수반된 문화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주어졌다는 명제가 진실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램의 해석은 분명 프라이스나 림머와 다른 것이었다. 버나드 램은 성경해석학 책을 쓸만큼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와 칼빈이 해석에 사용했던 성경 해석과 신학 방법론으로서의 "적응"(눈높이)의 방법을 잘 아는 조직신학자였다.

헨리 모리스의 <창세기 대홍수> 출간

램의 책이 나온 바로 직후 헨리 모리스는 은혜 형제 교단인 그레이스 신학교의 구약신학자인 존 휘트콤(John C. Whitcomb, Jr.)을 만났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1961년, <창세기의 대홍수>(Genesis Flood)라는 책을 공저로 발간하였다. 이 책은 프라이스 저작을 개작한 것이기는 하지만, 휘트콤의 신학적 기여와 모리스의 과학적 전문 지식을 통해 프라이스의 논점을 좀 더 설득력 있게 제시한 책이었다. 이 책에 대한 미국 보수 기독교인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엄청난 주문이 쏟아졌고, 젊은 연대와 격변론적 대홍수 지질학을 바탕으로 한 “창조과학” 운동이 비로소 본격화 되었다. 창조과학은 곧 영국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전까지 영국에서는 보수적인 반 진화론자들도 지구의 형성 연대가 오래지 않다는 생각을 발전시켜 본 적이 없었다. 이후 <창조과학> 자료들은 이슬람교의 교육을 위해 터키를 비롯한 여러 외국어로도 번역되었다. 창조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여러 연구 기관들이 설립되었고, 열정적인 평론가들은 공식적인 공개 토론에서 진화론자들과 논쟁하면서 창조과학을 옹호했다. 대학에서 훈련받은 지질학자들 중에서도 점차 창조론의 관점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나중에 법정에서 뒤집어지기는 했지만, 아칸소와 루이지애나 주의 입법자들은 창조과학을 진화론의 대안 이론으로 가르치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심지어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 후보는 창조과학을 가르치는 시간을 똑같이 배분해야 한다고 공립학교에 요청했다.

이에 상처 입은 기존 과학의 옹호자들은 이에 대한 응답으로 책을 발간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진화론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혹은 어떻게 가르쳐서는 안 되는지 하는 문제를 놓고 여러 마을과 도시에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1960년 이후 창조과학을 중심으로 한 창조론 논쟁은 미국의 공공생활에서 낙태 문제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문제보다 더욱 격렬한 문화적 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이 운동은 영국 뿐 아니라 캐나다, 호주, 한국(KACR), 일본 등지로 확장되어 갔다.

이것이 젊은 연대를 표방하는 “창조과학” 운동 출발의 간략한 역사이다. 그렇다면 이 젊은 연대 주장이 신학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이 문제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왜 기독교 안의 연대 논쟁이 신학적 딜레마인가에 대해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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