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기독교서회 서진한 사장
서진한 목사(대한기독교서회 사장, 기독교사상 발행인 및 편집인) ©기독일보DB

[설교 본문]

역사적인 순간이잖아요? 요 며칠 TV 보고 또 보셨죠? 이 채널 돌리고 또 돌리셨죠? 이런 주일에는 성서일과 본문을 따르지 말고, 다른 본문을 택해서 남북 화해평화 이야기를 해야 하나 싶기도 했는데, 본문 바꿔서 설교한들 남북 정상이 만나고 선언하는 그 장면들을 보는 것만큼 감동이 있겠나, 그 사실 그대로면 됐지 뭣 하러 사족을 붙이나 싶어서, 그냥 주어진 본문으로 설교하기로 했습니다.

이번엔 북한이 아주 많은 양보를 하고 대단히 적극적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살다가 이런 날을 맞는구나 싶습니다. 지난 몇 달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입니다. 아까 기도하실 때, 사람이 한 일이 아니라 하셨는데, 정말 사람이 한 일 같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상황이 이렇게 바뀔 수 있을까. 사람이 계산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쩌다 보면 주변 정세도 다 바뀌어 돌아가니 말입니다. 만약 힐러리가 대통령이 됐으면 이렇게 되기는 어렵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는 트럼프가 당선되어서 뭔 이상한 일인가 싶었는데, 남북관계에 이런 역할을 하게 되네요.

맞습니다. 하나님이 이끌어주신 것이지요.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면 많은 사람들이 부단하게 노력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문익환 목사님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통일을 염원하며 북을 드나들었고 그 때문에 고초를 당했습니다. 또 가까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겨울 밤거리로 나섰고,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을 세웠고, 그가 우리와 같은 꿈을 꾸면서 이런 사건을 벌이게 된 것이지요. 그런 염원과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일이지만, 사람들의 부단한 노력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세 본문 중, 사도행전에서는 빌립이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내시가 읽고 있던 구약성서 예언 말씀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며, 복음을 전합니다.

요한복음서의 본문은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고별의 말씀 소위 ‘고별사’에 속해 있습니다. 이 본문의 핵심은 ‘내 계명을 지켜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내가 하는 사랑 안에 있게 될 것이다. 계명은 무어냐?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는 장로 요한이 보낸 편지인데, 오늘 본문에서 그는 편지를 받는 교회에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들은 십자가 그리스도의 복음 곧 사랑을 전하는데, 그 사랑은 그리스도가 주신 계명이니, 그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라, 이렇게 한 맥락으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과 요한일서 두 본문에는 유사한 ‘사랑의 구조’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한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한다.’는 것과 ‘내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니까, 내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듯이,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고, 그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났으니, 우리도 그 사랑에 힘입어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셨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에 대한 응답이다. 사랑하면 우리는 그분 안에 있게 된다.’ 딱 이 구조입니다. 이런 사랑은 요한문서가 특히 강조하는 것입니다만, 어쨌든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 부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의 본문은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께서 ‘내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서 내가 하나님 안에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켜서 내 안에 있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향적 구조입니다. 사랑이 위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하향적 구조입니다. 그런데 요한일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이 흘러내려오는 하향적인 구조를 전제하면서도, 순환적인 혹은 교호적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16절에서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있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 예수님, 우리, 이렇게 내려왔는데, 요한일서는 여기에 더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도 하나님 안에 계신다고 합니다. 물론 요한복음에서도 포도나무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라는 구절이 언급됩니다만, 요한일서의 언급은 훨씬 더 강력하고 직접적입니다. 중간 매개 없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라고 강렬하게 주장합니다.

요한일서는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에게서 났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언급이 요한서신에 자주 나오는데, 사실 이것은 지식을 강조하는 것이고, 어쩌면 영지주의적인 영향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요한문서들은 영지주의에 강력하게 맞섭니다. 어쨌든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입니다. 신앙의 절정이라 할 수 있겠죠.

본문들을 묵상하면서 여기까지는 잘 정리를 했습니다. 지고한 신앙의 경지를 말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발이 돌부리에 걸리듯, 제 생각이 덜컥 한 구절에 걸렸습니다. 본문을 보다가. 늘 읽던 문장이고 자주 보던 본문인데, 그런데 ‘왜 이것이 이렇게 되어 있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걸린 것은, “하나님 사랑이시다.” 이 문장이에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렇게 말하는데, 그것을 직설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사랑’ ‘하나님 곧 사랑’이란 거잖아요? 성서 전체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문장은 요한서신에만 두 번 나옵니다. 4장 7절과 16절, 두 곳에 나오는데, 7절에는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합니다. 왜? 왜 그런가? 장로 요한은 답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6절은 아예 문장 첫 머리에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7절은 결론을 뒤에 붙이는 미괄식, 16절은 맨 앞에 결론을 내놓은 두괄식입니다. 요한일서의 이 본문은 사랑해야 할 이유를 대는데, 단지 윤리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사랑의 이유를 높이고 높여서 하나님의 존재까지 끌어 올려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문장에 걸렸느냐 말입니다. 오늘 설교는 사실, 제가 걸린 문제에 대해 숙제하듯이 생각하는 과정의 하나일 뿐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렇죠? 정의 역시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분이다.”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시는 분이다.” 혹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또는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 안에 거하는 분이시다.” 다 좋죠. 그런데 요한일서의 문제가 된 표현은 그것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왜 하나님은 사랑이지? 헬라어 문장은 이렇습니다. “호 데오스 아가페 에스틴”(ho Deos agape estin)입니다 호는 관사이고, 데오스는 하나님이며, 아가페는 사랑이고, 에스틴은 ‘~이다’라는 뜻의 동사입니다. 그런데 이 ‘에스틴’은 에이미(eimi) 동사의 3인칭 단수 현재형입니다. 아시다시피 헬라어는 동사에 시제, 인칭, 단수 복수가 다 동사에 반영됩니다. 그러니까 이 문장을 그대로 번역하면 ‘하나님은 아가페다, 사랑이다.’가 됩니다. 영어로는 God is love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에이미 동사는 영어의 be동사와 거의 같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라고 할 때, 하나님과 사랑은 동격, 수학적으로 말하면 이퀄이 됩니다. 이상한 문장이 됩니다. 우리가 이 문장에 하도 익숙해 있어서 느낌이 없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단어를 넣어보면 달리 느껴질 것입니다. ‘홍길동은 분노다.’라는 문장은 참 이상한 것입니다. ‘홍길동은 분노하는 사람, 혹은 분노의 화신’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철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보아도 이상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 아니고, 그냥 하나님이 사랑이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무한자(無限者)를 유한한 것을 가지고 규정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절대자, 무한자, 신은 그 무엇으로도 환치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엇과 대치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유한한 언어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는 나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사람도 알고 있는 사랑으로 딱 등가(等價)시키는가 이겁니다. ‘사랑하시는 분’도 아니고. ‘사랑의 근원이신 분’도 아니고,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부모님은 사람입니다. 맞는 말이죠. 사람은 부모님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집합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사람은 부모님이다? 안 맞는 말이죠. 큰 개념을 작은 개념으로 환치했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설, 말, 그것은 넘어서는 분이시잖아요. 하나님은 사랑을 하시는 분이지만. 사랑이란 것을 넘어선 분이잖아요? 물론 문학적으로 ‘내 마음은 호수다.’라고 표현할 때처럼, 단지 시적 표현 혹은 수사적(修辭的) 표현일까요? 글쎄요. 장로 요한이 당시 상황에서,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시적 장식을 했을까요?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문제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이런 ‘환치’의 문제는 접어놓고, 만일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하나님은 사랑으로 꽉 차 있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다른 속성들은 어떻게 되느냐 그거죠.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가, 전지전능이잖아요. 또 그분은 의(義)를 세우는 분이시죠. 정의, 공의의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시잖아요? 그리고 진노하시잖아요? 이런 것은 다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이 생기죠. 절대사랑이 심판을 어떻게 하지요?

아마 이 부분이 저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문제가 됐던지, 성서학자들은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사랑은 정의랑 절대 다르지 않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심판 모든 것은 다 사랑으로 하는 거라고 해요. 글쎄 저는 그게 잘 납득이 되지 않았어요. 뭐지? 논리적으로 이게 뭐지?

적어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전능, 하나님의 정의, 공의, 심판, 진노, 등 여러 하나님의 속성을 일정하게 제약하거나, 제한하거나, 배제하는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흔히 ‘자식을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합니다. 자식이 부모 보기에 말도 안 되는 결혼을 하겠다고 덤빌 때, 이거 못 이기는 거죠? 부모가 자식보다 훨씬 완력도 쎌 거고, 권력도 쎌 거고, 돈도 많고, 사회적 관계도 훨씬 클 텐데, 그래도 자식을 못 이깁니다. 그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자기가 가진 힘을 있는 그대로 다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은 그 힘들의 냉정하고 과감한 행사를 가로막습니다.

사랑이란 것은 다 아시다시피 관계개념 아니겠습니까? 관계를 상정한 개념이고 관계 안으로 들어온 ‘관계 내적’인 개념입니다. 사랑은 관계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 관계에 제약을 받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관계 안에 온전히 들어오시면 스스로 제약을 받으실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전능한 것, 정의로운 것, 진노, 심판 등등도 그것을 이루거나 처리할 대상 혹은 상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능한 힘을 행사할 대상이나 정의 구현의 대상, 진노와 심판의 대상은, 그 힘을 행사하고 판가름하는 분과 뗄 수 없는 관계로 묶여 있지는 않습니다. 관여하지만 관계 안에 들어가 있지는 않습니다.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객관적 관계일 뿐입니다.

구약성서에도 이렇게 관계 내로 얽혀든 것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계약’입니다. ‘네가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가 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죠. ‘너희가 뭘 하면 나도 뭘 하겠다.’ 일정한 조건을 전제로 스스로를 제약하신 거죠. 그런데 요한1서는 그런 조건적 계약이 아니라,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냥 먼저 사랑하셨다는…

이 문제를 놓고 여러 생각을 하다가, 저는 빌립보서를 읽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개역개정)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제약’입니다 사랑 때문에 자기 힘과 권능을 버린 겁니다. 지극히 높은 자리를 버리고 낮아지신 것이죠. 아니 사람이 되셨으니, ‘사람’이라는 제약 아래에서 살게 된 거죠. 말씀(로고스)이 육신(싸륵스)이 되었다는 요한복음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 때문에, 우주를 이루고 관장하는 질서, 곧 로고스는 한낱 살덩어리 같은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 육신으로 번역한 헬라어 싸륵스는 살덩어리에 가깝다고 합니다.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로고스인 그 거룩한 분은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고 고백하니, 절대로 고통을 받을 수 없는 분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전능하지 않게 되셨습니다. 아들이 죽어 가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정말로 전능하지 않은 분이 되셨습니다.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사람들 가운데 계신 분이 되었고, 사랑 때문에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분이 되셨습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라는 소설에서, 관헌에게 끌려온 서양인 신부가 예수상을 그린 판자 앞에 섰습니다. 그 상을 밟으라고 강요합니다. 망설이는데, 예수상이 말합니다. ‘밟아라. 나는 밟히기 위해서 왔다.’ 사실 현대신학의 고백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대단한 문학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밟히는 분이 되셨고, 고통의 하나님이 되셨고, 눈물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지옥 같은 아우슈비츠에서 사람들은 절규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현대신학의 고백은 죄 없는 사람들이 교살 당하고 가스실에서 죽어갈 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죽어간다, 함께 교살 당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 그것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 신학의 표식이 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수난 당하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느 신학자는 세월호 참사 때 하나님은 그 가라앉은 배 속으로 하나님의 거처를 옮기셨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 모든 현대신학적 개념과 상상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라는 이 선언에 연장선상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상대와의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게 맞다면, 사랑은 일방적으로 이뤄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분이 아무리 위대한 분이라 할지라도, 그 사랑은 일방적으로 완수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상대도 사랑할 때, 그때 완성됩니다. 이와 관련해서, 오늘 요한일서에서 장로 요한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12절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입니다.”(새번역)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제한하고, 스스로를 훼손하셔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은, 오직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에야 “완성되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 동안에, 그 거룩하고 희생적인 사랑은 끝내 완성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그 극진한 사랑은 고통 가운데, 상처 가운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그래서 또한 ‘자기 제약’이고, 사랑은 그래서 또한 ‘슬픔’입니다. 자신을 버리기까지 하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의 완성의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 손 위에 놓여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우리’ 사이에만 아니고, 남과 북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주어진 겁니다. 남북이 갈라져 대립하고 서로를 찌르고 상처를 주는 한, 하나님의 사랑은 상처 가운데, 고통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사족 하나 답니다. 사랑에 대해 논리적인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요한문서의 사랑이 대단히 추상적인 것 같지만, 요한일서가 말하는 사랑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우리가 그 읽은 본문 바로 앞쪽에 3장 17~1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머물겠습니까? 자녀 된 이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새번역)

사랑은 구체적으로 하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가운데에서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남과 북 사이에서도 구체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판문점 선언문을 뜯어보면서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대한민국 사는 사람 치고 통일을 말하지 않는 사람 없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통일, 말로 혀로 하는 통일이었을 겁니다. “북진통일”도 단어는 통일이지만, 통일하자는 것 아니죠. 쓸어버리자는 거죠. 대립을 완화하고 무기를 후방으로 물리고, 군사충돌을 피할 방안을 만들고, 긴밀하게 길을 잇고 철로를 만들고, 식량과 의약품을 보내주고, 헤어진 가족들을 만나게 해주는 그런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사랑은 헛된 사랑이다, 그런 생각 했습니다. 이 땅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랑이 평화 가운데서 꽃 피기를,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되기를 기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부족한 우리를 이렇게 하나님의 심중 한가운데 놓으시니, 우리는 늘 죄스럽고 부끄러울 뿐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심중에서 우리가 오롯이 사랑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남북 사이에 이 사랑이 꽃피게 도와주시옵소서. 정치적으로 타결하고, 경제적으로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세월과 세월이 만나고, 가슴과 가슴이 만나 서로 사랑하게 해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설교는 지난 2018년 4월 29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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