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화 목사
박종화 목사 ©기독일보

1. 목회자의 시간: "영원의 한 토막"

●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교회의 본적지는 "십자가 아래"이고, 교회의 출생시간은 "부활의 아침"이고, 교회의 첫 출발은 "마가의 다락방"이다. 이미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영원한 구원의 시간이 시작되었고, 이 구원이 성령을 통하여 마지막에 하나님께 받쳐지면 하나님이 "만유의 주"가 되시어 구원을 완성하신다(고후 15:29이하). 따라서 교회는 유한한 역사 속의 존재이지만 무한한 영원의 한 토막으로 산다. 목회자는 수치로 표기되는 역사의 일정 기간만을 봉직함이 아니라 영원무궁한 나라의 영원한 시간의 한 토막을 교회목회하며 산다. 영원한 주님이신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사신 것이 영원한 나라의 시작이요 한 토막인 것과 같다.

● 후배 목회자도 계속되는 영원의 한 토막을 목회자로 섬기며 산다. 지난 토막을 바꾸거나 뒤집거나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토막을 연결시키는 목회사역이다. 이미 십자가와 부활과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된 교회의 사역을 "계승"하고 새 토막을 연결시키는 "새 창조"의 사역이다. 따라서 목회자의 길은 "아주 오래된 새길"이고, 섬기는 교회는 "아주 오래된 새 교회"이며, 섬기는 시간은 "아주 오래된 새 시간"이다.

● 후배 목회자들이 "오래된 새 찬송"을 부르는 목회자이기를 바란다. 옛 가락이 지금의 맞춤법이나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정감과 감동이 물씬 붙어있고 부르면서 은혜를 받는 옛 가락을 바꾸는 대신 그대로 살려두고, 차라리 새 가사나 가락을 계속해서 덧붙여 풍성한 찬송가를 만들라. 한국교회가 쓰는 찬송가도 이렇게 발전시켜 시대적 토막의 풍성한 은혜를 담은 절수가 많은 풍성한 찬송가로 만들어져야 하며, 한국교회의 목회도 이처럼 계승과 창조가 아름답게 이루어지는 항상 "오래된 새 목회"로 귀감이 되기를 바란다.

2. 목회자의 교회: "개 교회"이면서 동시에 "공교회"의 목회자

● 목회자가 섬기는 교회는 규모의 대소와 관계없이 "출석교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개 교회"(local church) 임에 틀림이 없다. 교인들의 신앙적 영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할 책임이 목회자에게 있다. 그것이 양적 성장이거나 질적 성숙을 요청하는 것이라 해도 그 성격엔 변함이 없다. 개 교회의 출석교인들은 특성상 "모이는 교회"를 중시하며, 모여서 예배와 교회내의 활동을 통하여 영적 욕구충족과 개인적 신앙의 풍성함을 얻고 싶어 하며, 개인적 심령구원의 확증을 얻고 싶어 한다. 이 일에 목회자는 헌신하며 개개인의 충성된 목자이기를 기원한다.

● 동시에 교회는 작든 크든 상관없이 보편적인 "그리스도의 몸"을 대변하는 존재이기에, 개별 목회자나 개 교인의 생각과는 별도로 교회가 몸담고 있는 지역사회와 한국사회 전체가 "그리스도교회의 대변자" 또 그렇게 평가한다. 개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와 인류 전체를 구원하신다는 그리스도의 뜻과 계획 때문에 개 교회는 하나의 "보편적인 공교회"(universal church)의 모습을 띠게 된다. 이런 교회는 또 목회자는 세상으로 들어가는 "흩어지는 교회"를 유념에 두고 목회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개체성이요 동시에 공동체성이다. 그것도 "그리스도 때문에!" 이 일에 목회자의 또 다른 헌신과 정성이 요구된다.

● 모이는 교회의 "영적 신앙적 열성"과 함께 흩어져 세상의 한 복판에서 살아야 하는 교회의 "공공적 윤리적 책임"이 동시에 강조되어야 한다. 교인들은 물론이지만 특히 목회자의 깊고 경건한 "영성"과 함께 넓고 모범적인 "도덕성"이 한국교회 및 한국의 종교 전반의 "생존"에 크게 영향을 미치며, 동시에 그것이 우리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선교적인 사명"의 윤활유가 될 수도 아니면 저해요인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은퇴자나 현역 목회자 모두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교회 안에서 또 교회 밖에서 noblesse oblige의 길에 모범적으로 나서길 바란다.

3. 목회자의 선포: "말씀선포의 감동"과 "예전 속의 신비경험" 의 결합을

● 그리스도교의 전통 가운데에서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는 말씀선포 보다는 성례전의 신비를 경험케 하는 예배가 강조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성례전적인 신비의 경험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 두 요인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자조화의 요인들이다. 여기서는 다만 목회자의 입장에서 현실교회의 형편을 살피고 보다 바람직한 예배목회 방향을 제언하려는 것이다. 가톨릭과 정교회의 예전중심 예배는 이미 예전 집행자인 사제에게 사도적인 권위를 부여하기 때문에 사제의 직책상의 권위가 중요하지 인품이나 인성이 신비적 신앙경험을 맛보는 일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 이지적 깨달음 보다는 영성적 감동을 중시한다. 예전적인 신비의 경험을 중시한다. 평신도가 말씀의 지성적 맛과 깨우침을 목말라 할 수 있다.

● 개신교는 Tradition 대신에 sola scriptura를 기저로 택한 때문에 성례전적인 신비체험 보다 말씀을 설교를 통해 선포하는 신앙적 계몽에 방점을 둔다. 문제는 설교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예전의 신비는 제도적으로 규범화되었지만, 설교를 통한 감화는 청중의 개별적인 판단에 맡겨진다는 사실이다. 설교자의 지성과 인성이 동시에 판단의 대상이 된다. 설교가 시시비비의 대상이 된다. 예전은 그렇지 않다. 반지성적 감성주의도 문제이지만 반감성적 율법주의도 시비가 된다. "한 손에 신문을, 다른 손에 성서를" 들지만, 실제로는 "성서가 신문을 판별"해 주는 설교(Barth)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일반 지성미를 갖추되 궁극적으로는 "신학적" 지성에 철저해야 한다. 설교중심주의를 고집하는 한 피할 길이 없다. 그래서 부탁인데, 목회자에게 "평생신학교육"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 과거 신학생 시절의 신학연수와는 판이하게 그 성격이 다르다. 신문으로 상징적으로 대표되는 역사의 현장에 대한 성서말씀의 정당한 판단과 살아있는 답변을 설교를 통해 이끌어 주어 교인들의 실천적 신앙생활을 이끌어 주어야하기 때문이다.

● 종교개혁 당시의 처절했던 교회 내의 아픈 상황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제는 개신교도 말씀선포에 방점을 두면서도 그간 도외시 했거나 경시했던 "성례전적 신비의 경험"을 되살려 말씀의 기쁨과 성례전의 감동을 재결합시켜 놓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특히 오늘날처럼 정보와 언어의 홍수 속에서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여 신앙인들 스스로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의 신비한 은혜에 직접 접목시킬 수 있는 성례전의 신비를 개신교 예배가 제공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진정으로 추구하던 "살아있는 말씀과 신비한 성례전"의 온전한 결합을 우리 후배 목회자들이 회복시켜 보람찬 목회로 전진하길 바란다.

/글=한국복음주의협의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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