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기독교서회 상무 박만규 목사
대한기독교서회 상무 박만규 목사

대림절은 이 땅에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이런 큰 분을 준비 없이 맞이할 수 없어서, 대림절을 통해서 맞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한 게 있으면 우리 마음을 비우고, 주님을 모셔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주님께서 오실 공간을 마련한다는 뜻 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악한 생각, 악한 마음이 있다면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오시지 못하기 때문에 선한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대림절의 뜻에는 우리에게 오시는 미래, 오고 있는 미래라는 의미기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모시는 이와 같은 일을 기획한다고 해서 우리 기획된 자리에 그분이 오시겠습니까? 다음주 25일 성탄절이 되겠지만, 주님이 오시는 그날을 기획한다고 해서 그 기획대로 그분이 오셔서 은혜를 베푸시지는 않겠지요?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데, 하나님을 우리 가운데 모시기 위해서 우리가 오실 길을 준비하고, 오셔서 거할 장소를 준비하는 대림절이 되어야겠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기쁨을 선포하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생각해봅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요시아 왕 때 활동했던 선지자 입니다. 소 선지서 예언자 가운데, 유일하게 왕족으로 언급됐던 선지자입니다. 선조 히스기야왕은 북이스라엘이 하나님 명령을 어김으로서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상과 모든 이방 관습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도록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히스기야가 종교개혁을 단행했지만, 그 아들 므낫세에 의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우상을 다시 섬겼습니다. 그 아들 암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시아 왕이 어린나이에 즉위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남 유다는 종교 혼합주의에 빠졌습니다. 다시 바알을 섬기고, 앗시리아 종교인 일월성신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종교적 혼합주의에,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시기였습니다. 이 당시 국제정세속의 유다왕국의 처지도 매우 어려웠습니다. 앗시리아 제국과 바빌론 제국이 패권다툼 끝에, 결국 바빌론에 의해 앗시리아가 쓰러져 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국제적인 세계역사의 판도가 바뀌는 역사적 혼란기였습니다. 바빌론과 앗시리아 제국의 힘이 너무 막강해서 유다는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바빌론에 의해서 망하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바빌론에 의해서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스바냐는 예루살렘의 우상숭배와 불의한 삶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훼의 날'을 말합니다.

이 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구원의 날로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 오셔서 암울한 우리를 건져주실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모빙켈은 야훼의 날을 신년 축제 때 여호와께서 왕으로 즉위하셔서 모든 고난으로부터 우릴 건져주시는 날로 해석했습니다. 즉, 야웨 하나님이 혼돈으로부터 우주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날을 재연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날로 생각했습니다. 폰 라트는 거룩한 전쟁의 개념으로 이해했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나타나셔서 적들을 물리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젤리스는 스바냐 1:8을 두고 야훼께서 이 우주적인 전쟁에서 적들을 파괴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로 이해했습니다. 이 날은 특별한 징조로 생각한 것 입니다. 엄청난 심판이 오는 야훼의 날을 이방인에게 심판이요, 하나님 백성에게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생각하여 왔던 야웨의 날에 대한 전통적 개념입니다.

그러나 스바냐는 오히려 하나님 백성인 자신들도 '야웨의 날'에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선포합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유다와 예루살렘의 범죄(1:4-6, 3:1-8) 때문입니다. 야웨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한 계약의 법을 어겼습니다. 주위의 신들을 섬기는 종교혼합주의의 죄를 범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의 부패가 결국 유다, 예루살렘을 심판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여도, 하나님과의 계약법을 어기면 그 또한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심판이 '야웨의 날'에 일어나게 될 것임일 선포합니다. 둘째로, 힘 있는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한 것에 대한 심판도 함께 선포합니다. 다윗왕국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모두 구원받을 것이라는 전통적인 견해에 스바냐는 문제를 제기 한 것입니다.

그러나 스바냐는 이와 같은 암담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상숭배에 떨어지지 않은 사람들을 남겨놓았다고 말합니다. 심판만 말하지 않고, 구원을 말합니다. 오직 남은 자들이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선포합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를 찾으며, 겸손을 찾으라고 말함으로서 구원의 가능성을 표시합니다. 스바냐 3:9절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이 겸손을 찾고, 공의를 찾는다 해도, 이는 사람에 의해서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속해있는 은총의 행위로 가능 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들은 '야웨의 진노의 날'에 '남은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구원의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3:12-13, 14-17)

모든 이방나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라도 곧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하나님이 어느 것에도 상관하지 않으신다 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날이 가까이 왔음을 선포합니다. 즉, 구원은 인간의 능력이나 재산 정도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선택되고 남은 자가 구원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루살렘 주민들의 현재와 미래는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 그의 분노가 코앞에 놓여있습니다. 실제로 스바냐 선지자의 예언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예루살렘은 바빌론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믿었던 남은 자들도 이러한 상황을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스바냐는 노래하고 기뻐해야 할 이유와 그 근거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암담한 상황을 해결해주시는 그날과 그때는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16절은 말합니다. 예루살렘과 시온에 과거에 패역하고 더럽고 포악했던 이들에게 구원의 신탁이 주어지겠고, 그래서 이들에게 두려워 마라. 팔을 늘어뜨리지 말라고, 새로운 용기를 주십니다. 19절에는 '때가 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모든 압제자들을 다스리고 '벌하겠다'고 말합니다. 전쟁의 용사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적을 물리치십니다. 상처 받은 자들, 고통당하는 자들, 흩어진자들을 다시 모으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고대 근동에서 왕의 역할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고, 목자와 같은 왕에 대한 은유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수치와 고난을 당했지만, 앞으로 온 땅에서 하나님 백성들이 명성을 얻고 찬양을 얻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그날에는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시고, 하나님이 남은 자를 사랑으로 새롭게 하시고 노래로 기뻐하시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도 고난과 시련이 오는 걸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날이 오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전능자이기 때문이라고 스바냐 선지자는 말합니다.

복음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세례 요한이 왔던 시기에 대해서 눅 3: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를 통치하고 헤롯이 본붕왕으로 통치하던 시기였습니다. 그 때, 빈 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임했습니다. 이후로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해서 외쳤습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눅3:4-6) 요한의 이 외침은 회개를 촉구하는 외침이었습니다. 게으르고 나태한 자아의 사막에서 벗어나 아집의 골짜기를 메우고, 위선의 산을 깎아 주님께서 오실 길을 곧게 하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왜 유대 사회 안에 깊숙이 들어가지 않고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외롭게 말씀을 외쳤을까요? 아마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가 로마의 통치 아래 있었고 지도자들이 모두 로마의 앞잡이였다는 사실, 이미 사람들은 그러한 체제에 길들여져서 순응해 가는 현실, 그래서 요한은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부터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점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하고, 정말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요한의 외침은 점점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3:7-8)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는 자부심은 세월과 함께 어느덧 그들에게 우월감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우월감은 언제부터인가 종교적 특권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당연히 구원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3:8) 태초에 하나님은 첫 인간 아담을 흙에서 취해서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빈 들이나 광야에 굴러다니는 돌들을 취해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삼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요한이 이렇게 말할까요? 구원은 구체적인 회개와 돌이킴으로서 주어지는 것이지, 혈통이나 신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요한은 말씀합니다.

"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3:9) 심판의 긴박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공연히 겁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태연하게 주님을 뜻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것은 이 긴박감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임박한 진노와 심판에 나를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을 내가 맞이한 것처럼 내일도 당연히 맞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요한이 전해주는 말씀을 듣던 군중들도 바로 그런 심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3:10) 마치 노래의 후렴처럼 이 질문이 무리들에게서 세리들에게로 번져가고 세리로부터 군인들에게로 번져갑니다. 이 물음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한 의지가 배어나는 물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물음은 대림절을 지나며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들도 마땅히 물어야 할 물음입니다.

첫 번째 '무리'에 대한 요한의 대답은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누어주고 먹을 것 있는 자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는 것'이 아니라 '나누라'는 말씀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재물은 축적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고 이웃들과 더불어 나누는 것에 그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또 세리들에게 말합니다.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여기에서 말하는 세리는 토지세나 인두세를 거두어들이는 세리가 아니라, 통행세나 관세, 조세나 부과금등을 거두어들이는 '톨 콜렉터스(toll collectors)'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고 동족들에게 부당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 때문에 동족들로부터 원성을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요한은 그런 그들에게 앞으로는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구체적으로 말해줍니다.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 어떤 경우에라도 돈과 이익에 대해 정의로워야 합니다. 요한은 마지막으로 군인들에게 말합니다.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로마 군단이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군인들은 분명히 세리들을 보호하기 위한 병력이거나 헤롯 안티파스를 위해 일하는 병력이었습니다. 요한이 그들에게 준 처방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폭력으로 강탈하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허위 명목으로 수탈하지 말라는 것이고, 셋째는 받은 봉급으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힘 꽤나 가진 이들이 흔히 빠지는 유혹은 그 힘을 행사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에 의하면 직권을 남용해서 부당한 이익을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요한이 말하는 것들은 모두 회개한 사람들이 살아내야만 하는 구체적인 삶의 모습들입니다. 거짓과 탐욕과 착취로 사는 삶은 사실은 이 세상에서 기쁨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전형적인 몸부림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기쁨을 잃어버리면 그는 이내 이기와 탐욕의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탐욕에 행복이 있는 줄 잘못 알기 때문이고, 이기주의적인 삶이 그것을 성취해줄 거라고 단정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기쁨을 아는 사람은 말씀 안에 담긴 진정한 행복을 찾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그 행복을 알고 그 행복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스바냐 선지자가 말하는 기쁨은 철저하게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이요, 하나님에게서 오는 기쁨이며, 하나님 자신의 기쁨입니다. 태양이 빛나는 곳에 어둠이 깃들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계시는 곳에 슬픔이 깃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바냐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해 두려워하지 말고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고 그토록 당부하고 있습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기쁨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이 기쁨도 역시 '주 안에서'라는 조건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계시는 곳에 기쁨이 있으며, 이 기쁨은 주님께로부터 흐르는 기쁨이고, 주님 자신이 기쁨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하루도 염려하지 않는 날이 없고, 오히려 염려가 내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꽃이 거친 바람을 탓하지 않고, 태양을 향해 자기를 열고 서 있듯이,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향해 서 있을 때, 내 마음과 생각을 아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그토록 회개를 촉구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를 통해서만이 비로소 이 벅찬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기쁨을 얻을 수 있을까요? 엊그제 신문을 보니까 네덜란드 교회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네덜란드 헤이그의 베델교회에서 아르메니아 망명자 가족의 추방을 막기 위한 '마라톤 예배'가 진행되고 있다. 네덜란드 헤이그의 베델교회에서는 하루 24시간 내내 예배가 진행된다. 10월26일 오후 1시30분부터 한순간도 쉬지 않고 설교와 찬송이 이어졌다. 10일까지 1100시간 가까이 이어진 마라톤 예배는 이 교회에 머무는 아르메니아인 가족 5명의 추방을 막기 위해서다.

네덜란드의 전체 교회 차원의 관심사로 발전한 이 예배의 이야기는 탐라지안이라는 아르메니아인이 2010년 조국을 탈출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아내, 자녀 셋과 함께 남서부 해안 도시 캇베이크에서 임시 거주 허가를 받고 영주권을 얻기 위한 소송 등을 6년간 진행했다. 정부와의 소송에서 이긴 적도 있지만 결국은 패해 추방 통고를 받았다. 네덜란드에서 5년 이상 거주한 미성년자는 영주권을 받는 방법도 있었지만, 자녀들은 이 심사에서도 탈락했다. 야당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 탐라지안은 생명의 위협을 받아 조국을 떠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사연이 알려지면 아르메니아에 남은 친인척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이유로 자세한 내막은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있다.

탐라지안 가족은 추방 위기에 몰리자 교회로 대피했다. 네덜란드 법률에는 공권력이 도망자를 붙잡는다는 이유로 예배를 방해할 수 없다는, 중세 이래의 조항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 가족은 애초 캇베이크에 있는 교회로 도피했다가 헤이그로 이동했다. 마라톤 예배를 하려면 대도시 교회가 유리하다고 교회 조직이 판단했기 때문이다. 앞서 경찰은 단순히 교회 안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는 체포를 피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예배는 20개 교파 목사 550명이 돌아가며 진행한다. 신교 쪽이 중심이지만 일부 가톨릭 사제들도 동참하고 있다. 다른 지역에 사는 목사들은 차 트렁크에 예복을 챙겨 헤이그를 오간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이들도 이 가족을 돕겠다며 나서고 있다.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된 탐라지안의 21·19·15살 자녀는 자원봉사자들이 가르친다. 탐라지안 가족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데르크 스테헤만 목사는 "북쪽에서도, 맨 남쪽에서도, 동쪽에서도, 서쪽에서도 온 나라 사람들이 (탐라지안 가족을 도우러) 온다. 놀랍다"고 <뉴욕 타임스>에 말했다.

마라톤 예배가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다. 물밑 협상이 진행중이라는 소식도 있지만,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입장을 바꾸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다. 교회 쪽은 탐라지안 가족의 망명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마라톤 예배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한겨레 2018.12.12.)

우리가 대림절을 지내고 있는 이 때에, 이와 같은 벅찬 기쁨이 우리가 주님을 맞이하고 있는 기쁨이, 우리에게 있었으면 하는 기대를 해봅니다. 한국교회가 작은 일에 선택과 집중을 통해서 주님이 오시는 절기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갖을 수 있는 일을 하나쯤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는 절기에 참으로 기뻐하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감사로 하나님께 아뢰면서 하나님의 평강과 기쁨이 벅찬 은총으로 우리에게 임해주시기를 이아침에 간구합니다.

* 설교는 지난 2017년 12월 17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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