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트만 박사(우)와 통역을 맡은 박성규 교수(좌).   ©이동윤 기자

몰트만 박사(튀빙겐대학교)가 그의 저서 '희망의 신학' 50주년을 맞아 '한국을 위한 신학적 성명서'를 발표하며, 자신의 신학에 대한 총체적 평가와 변증을 했다.

12일 장신대 주최 '위르겐 몰트만 교수 초청 특별강연회'에 초청된 몰트만 박사는, '위대한 희망 - 그리고 신학 50년, 한국을 위한 하나의 신학적 성명서'이라는 주제로 두 번째 강연을 전했다.

몰트만 박사는 "나는 오늘 한국에서 나의 신학적 성명서를 발표하고자 한다. 이것은 내가 지난 50년간의 위대한 희망의 관점에서 본래 말하고자 했던 것과 나에게 중요한 것의 요약"이라고 말했다.

그는 "2014년은 본인이 1964년에 출판했던 '희망의 신학'이 50년이 되는 해"라며, "저자는 50년 동안 자신의 희망으로 무엇을 했는가. 그 이후에 저술한 책들은 계획된 것들이었는가, 아니면 우연이었는가. 그 위대한 희망은 자신의 신학 50년의 중심 사상인가. 아니면 또다른 중심 주제를 발견했던가. 나는 잘 모르겠다. 저자라고 해서 자기 자신의 연구를 평가하기에 최고는 아니다. 박사과정의 학생들이 훨씬 더 나은 탐정일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범인의 흔적을 찾고 범인을 공정하게 체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전했다.

이어 "나는 언제나 앞을 향하여 살아왔고, 모든 새로운 사상들에 그렇게도 깊이 매료되었다. 나는 옛 저서들을 내가 기꺼이 읽어본 적이 없다. '삶은 앞을 향해 살아야, 뒤를 향해 이해된다'고 키에르케고르는 말한 바 있다. 나는 언제나 앞을 향하여 추진해왔으며, 내가 저술한 것을 변호하기 위해 정지한 적은 결단코 없다. 그러나 오늘 나는 뒤를 한 번 돌아보면서 시도해보고자 한다"며 강의의 포문을 열었다.

이날 몰트만 교수 특별강연회에 참석한 장신대 학생들이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다.   ©이동윤 기자

몰트만 박사는 '희망의 신학'을 쓰게 된 동기가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메시아적-마르크스주의적 철학'이었다고 밝혔다.

몰트만 박사는 당시 에른스트 블로흐가 쓴 '희망의 원리'(1961년)에 깊이 매료됐다며, 그 이유에 대해 블로흐의 철학은 그 자신이 고백했던 것처럼 '성서를 통해 세상에 나타난 종말론적 양심'에 의해 관철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몰트만 박사는 "나를 매료시킨 것은, (블로흐가 쓴 '희망의 원리')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왜 신학은 희망이라는 이러한 성서의 주제를 놓치고 말았을까. 하나님의 약속과 인간의 희망이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의 글과 신약성서의 사도들의 글을 관통하는 중심사상이 아닌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메시야 나라의 기대에 있어서 일치하고 있지 않는가. 조직신학에서 모든 것은 종말론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 않는가. 독일의 격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은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나는 블로흐를 복사하거나 블로흐에게 기대고자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희망의 원리'에 병행하는 작업을 신학 안에서 성서적인 근거 위에 시도하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희망의 신학'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몰트만 박사는 '희망의 신학'이 나오게 된 시대적 배경도 설명했다. 그는 "1964년 독일에서는 신학적 토론이 한편으로는 칼 바르트와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루돌프 불트만과 그의 학파 사이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바르트주의자들은 '위로부터 아래로 수직으로'라고 하는 계시신학을 대변했다. 불트만학자는 신앙을 인간학적으로 '아래로부터' 비신화화 시켰다. 양측 모두 미래, 역사 그리고 희망과는 많은 것을 시작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그때 이미 그러한 양 진영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 제시됐는데, 곧 게르하르트 폰 라트의 '구약성서 신학(1958, 1960)이었다. 이것은 역사적인 기억들과 예언자적인 약속들에 관한 신학이었다. 볼프하르크 판넨베르크와 나는 바르트와 불트만을 넘어서기 위해 폰 라트의 신학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판넨베르크는 자신의 보편사에 대한 생각으로, 나는 나의 약속의 역사라는 생각으로 출발했다"고 밝혔다.

더불어 "1964년에는 또한 정치적 상황도 변했다. 보수적인 전후시대는 지나갔다. 여기저기 곳곳에서 새로운 해안을 향한 출발들이 일어났다. 당시 우리 젊은이들은 빌리 브란트와 사회민주당(SPD)와 함께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감행할 것'을 요구했다. 나의 '희망의 신학'은 공적인 카이로스, 가장 적절한 기회를 만났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몰트만 박사는 "나는 모든 형태의 희망의 신학에 ▲하나님의 약속 개념 ▲새 생명 안으로의 그리스도 부활 이해 ▲선교로서의 인간역사 이해 같은 중요한 세 가지 핵심 사상이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희망의 신학'에서 나는 하나님 약속의 미래 개방적인 성격을 매우 강조했다"면서 "왜냐하면 오직 희망의 신학만이 아브라함과 사라와 이스라엘 백성이 했던 것처럼, 낯선 곳을 뒤로 할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그는 "'희망의 신학' 안에서 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신학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왜냐하면 부활은 기독교 종말론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나의 신학 50년 과정 동안 그 중요성을 더해갔고, 후에 나로 하여금 동방정통 신학적인 연합을 형성하도록 이끌었다"고 밝혔다.

이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부연하며, "그리스도 부활의 지평에서 역사 안의 삶은 과제가 되며, 선교가 된다. 하나님의 약속들은 우리에게 약속된 미래를 준비하고 성취할 가능성을 볼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거역하는 역사적인 상황들이 있다. 그러한 역사적 정황들에 대해 그것들이 바뀔 때까지 저항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일치하는 역사적 정황들도 있으며, 그것에 대해서는 지원해야 한다. 원칙적으로 역사란 불의와 죽음의 옛 세계의 시대와 평화와 의와 생명의 새 세계 시대의 충돌이다. 올바른 쪽에 서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선교이다. '희망의 신학' 이후 40년이 지난 2010년에야 결국 나는 '희망의 윤리'를 집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몰트만 박사는 미국에서 '희망의 신학'이 아메리카 식의 낙관주의와 '긍정적인 사고의 힘'이라는 의미에서 읽히고 있다는 사실을 1968년에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수난 속에 있는 부활의 뒷면에 대해 집필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결심으로부터 1972년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 완성됐다고 말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 대해 몰트만 박사는 "'희망의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그들 안에서 고난 당하시는 '십자가에 달리시는 하나님'"이라며 "이 책을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것은 사실이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1945년 제3차 세계대전 이후 포로수용소에서 하나님 떠남을 겪었을 때, 예수께서 나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오신 것이 바라 이 하나님의 탄원을 통해서였다. 그와 함께 고난당하심이 나로 하여금 희망을 갖고 바라보게 했다"고 밝혔다.

또 몰트만 박사는 1985년에 기포드 강연에서 종말론적인 창조 이해를 피력했고 동시에 생태학적 희망을 수렴했다며, 그때 출판된 책이 바로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생태학적 창조론(1985)"이라고 전했다.

아울러 그는 1989년 성령의 생명력에 사로잡혀 본래의 계획과는 달리 '생명의 영: 통전적 성령론(1991)에 관한 책을 집필했고, 1997년에는 '생명의 원천: 성령과 생명의 신학'에 관한 소책자를 출간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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