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박사
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김영한 박사 ©기독일보 DB

II. 3.1운동과 기독교의 역할

1. 교회의 중심 역할

1) 기독교인들의 자발적 참여

3.1운동 당시에 전국의 인구는 2,000만 정도였고, 기독교 세력은 신구교를 합하여 3,252개 교회에 20~30만명 규모의 교인으로 인구 대비 1~1.5% 정도의 교세를 형성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통계에서는 2,883개 교회에 355,114명의 신도로 파악하고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가 2019년 2월 20일 공개한 '3·1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1919년 3·1 운동 당시 국내외에서 최다 103만명이 시위에 참가했으며, 일제의 탄압으로 최다 934명이 숨진 것으로 집계됐다. 이 집계는 일제의 기존 자료에 기록된 시위 참여자 58만명, 사망자 553명보다 최고 1.7배 높은 수치다.

함석헌옹은 3.1운동에서 다른 종교의 역할도 컸지만 "기독교신앙 없이는 3.1운동이 없다"고 하였다. 기독교의 역할은 주도적이었다. 한국 기독교인은 3.1운동에 신앙적 결단으로 자발적,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동자로 나서고 지도력을 제공했으며, 3.1운동 확산의 조직을 제공하고, 통로가 되어 큰 기여를 했다. 교회가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3.1운동은 일어날 수도 없었다. 이 항일 시위의 핵심과 역동 기구는 기독교였다.

3.1독립운동은 기독교를 제외하고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기독교의 역할이 지대했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시 기독교 인구는 20만 명을 넘지 못했으며, 그에 비하여 천도교 인구는 100만 명을 넘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에 기독교 인사가 16인(참고 천도교 15인 불교 2인)이 서명한 것은 종교인구 비율이 아니라 그 영향력의 비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3.1운동에 기독교인들이 참여한 역할과 영향에 있어서 "기독교는 3.1운동의 초기 조직화 단계의 7개 계열 중 6개 계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고, 최초의 독립선언이라 할 수 있는 2.8학생독립선언을 후원했다." "민중운동화단계에서도 전국교회의 조직과 지도자를 제공하였으며 3.1독립선언의 이념도 기독교에 영향 받은 바가 컸다." 기독교를 통해 전해진 자유와 평등 사상의 유입은 수평적 시민사회를 구현하는데 중심이 됐다. 구한말 한민족의 근대화에 기여한 기독교가 일제의 억압통치로부터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구현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는 것은 자명한 결과였다.

미국북장로교회 한국선교회의 보고는 1914년 현재 1,688명의 장로교 감리교 성직자, 2,300여 개의 예배당, 20만여 명의 신도라고 하였다. 1918년에는 한국선교회와 교회들이 참가한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라는 연합기구도 발족시켰다. 장로교와 감리교는 교육과 의료사업도 일부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전국적으로 교회와 연계된 학교가 832개나 되었다. 1918년 12월 말에는 개신교인 219,220명, 천주교와 정교회 교인 99,488명을 합하여 총 318,708명이었다. 이들이 3.1운동 때 활동자원이 되었다. 개신교 교회는 3.1운동 당시에 35년의 짧은 역사를 지녔고 작은 세력이었으나, 미국과 캐나다의 여러 교단 선교부들의 교육, 의료 활동의 지원과 신앙지도를 받으며 급성장하였다.

3.1운동 당시에 한국교회는 짧은 역사와 미약한 교세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인 조직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장로교회 측에서는 1907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 7명을 목사로 장립하고 선교부로부터 독립된 조선예수교장로회 독(獨)노회를 세웠다. 1912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구성하였다. 북감리교회는 1901년부터 한국인 목사를 세우기 시작하여 1908년에는 조선연회(Korea Conference)를 조직하였으며, 남감리교회에서도 1918년 조선 연회가 구성되었다. 실제로 한국교회는 정부기구를 제외한 조직공동체로서는 가장 크고 잘 연결된 조직과 기구를 형성하게 되었다.

1919년 3월에서 4월 중에 전국적으로 1,214회의 독립만세모임이 있었다. 그 중에서 큰 운동이 일어난 곳이 340회 정도이고, 실제로 체포된 사람들의 종교별로 분류에 의하면 기독교인이 3,373명, 천도교인이 2,283명, 유교가 346명, 불교가 220명, 무종교가 9,304명, 미상이 390명이라 집계되었다. 당시 기독교신자수는 천도교인수의 1/12 또는 1/4밖에 안되었지만 체포된 교이누수는 기독교인이 천도교인의 비율이 3;2의 비율이 된다.

2) 초기 기독교회당은 애국지사의 거처

일제(日帝)는 한국과 합병을 꾀하려 할 때 명철한 말로 반대했던 명성황후를 자객들을 시켜 시해하였다. 일제는 "여우사냥"이라는 작전으로 경복궁에서 잠자 던 국모(國母)를 칼로 죽여(1895, 8, 10) 불로 태웠다. 이런 사건 후, 고종 임금은 매일 떨며 살았고, 독살 당할까 봐 밥을 가져오면 개에게 먼저 먹였다고 한다.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내외는 조선왕실과 돈독한 관계를 가졌다. 언더우드 부인은 명성황후의 시의(侍醫)였으며 민비 시해사건 이후 정치적 위기 속에서 언더우드 선교사는 고종황제를 호위하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대중적인 고종 탄신 축하행사를 수행하기도 했다. 명성황후(민비)는 생전 언더우드 선교사 부인과 친숙하게 지냈고, 전도도 받아 천국에 가고 싶다는 고백도 했다고 한다. 고종 임금도 일제와 문제가 생기면 반드시 언더우드를 불렀고 상의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각 지역 교회는 애국지사의 집회와 결사의 처소가 되었다. 그리하여 한국의 기독교는 민족교회로 발전했다. 교회는 일제 지배 하 절망에 처했던 민족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던 단체였다. 교회는 민족의 얼과 그 힘의 맥이었다. 민족의식의 결정과 그 표현의 무대였다. 한국에서는 일제의 박해 때문에 교회가 민족혼의 산실이 되었다. 이것은 한국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의 보호아래 치외법권적 영역이 되었고, 총회와 연회, 지방회나 노회를 중심으로 총독부의 발길이 닿지 않는 연락망을 갖추었다. 그리하여 당시에 교회조직은 유일한 전국적 조직체로서 연락망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교회는 나라를 잃은 한국인들이 가장 쉽게 모일 수 있는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교회를 통해 서양의 문물이 교계의 신문 잡지들에 소개되었고, 각종 사회문제와 시국문제도 논의되었다. 그러한 여건 아래 교회 주변에서 신민회, 조선국민회, 송죽 결사대, 한영서원 비밀결사 같은 항일 단체들이 조직되어 활동 할 수 있었다. 105인 사건의 실체였던 신민회는 서북지방 기독교인의 인적 네트워크에 기초한 비밀결사였고, 여기에 가담했던 기독교인들이 이후 직간접적으로 삼일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독립선언문이 발표되고 3.1 만세시위가 시작되자 그 중심에는 기독교인들이 한마음으로 뭉쳤다. 4월말까지 격렬한 시위가 전국적으로 전개됐고 거점은 교회와 기독교사학이었다. 기독교가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이유에 대해서 기독교계가 3.1운동에 앞서 전국적 연락망을 구축하고 있었던 점, 종교기관만 유일하게 합법적 집회의 자유가 있었던 점, 항일민족운동의 역사적 흐름을 기독교가 연결시켜온 점, 신앙의 자유를 빼앗으려고 한 점, 기독교인들이 신앙과 민족을 일치시키려고 했던 점이다.

3) 초기 기독교인들의 애국 실천

기독교가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민족자결주의 사상이 선교사들을 통해 교인들에게 설교로 전해졌고, 총회, 노회, 시찰회, 당회라는 기독교 특유의 조직을 통해 전국으로 일시에 확산될 수 있었고, 각종 유인물을 교회 안에서 등사로 찍어 대량으로 살포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교회는 전국적인 자발적인 민족조직체였다. 3.1운동의 전국적인 확산도 교회들과 교회가 세운학교들 중심이었다.

3. 1운동은 기독교가 아니었으면 일어날 수 없는 운동이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전체 인구의 1.3-1.5%에 불과했으나, 3.1운동 주동세력의 약 30%를 차지했다. 3.1운동에 영향을 미친 동경 2.8독립선언 역시 주체는 동경 유학생 학우회였지만 핵심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은 16명, 준비과정 핵심인물 48인 가운데 23명이 기독교인이었다.

3.1운동 기간 기소피고인 종교별 통계에 따르면(3월 1일~5월 27일), 기소피고인 총 7835명 중 기독교인은 22%에 해당하는 1719명이었으며, 입감수형자도 총 9059명 중 기독교인이 22.4%인 2032명(천주교인 53명 포함)으로 가장 많았다. 당시 기독교 인구가 29만명, 전체 인구의 1.8%에 불과했던 점을 생각하면 기독교인들의 참여와 역할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일제는 기독교 세력을 조선 식민지화의 가장 큰 저항세력으로 파악하여 회유와 탄압정책을 펼쳤다. 일제는 조선교회의 세력이 커가고 서구세력과 연계되어 있는 점을 유의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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