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CCK 총무 김영주 목사
NCCK 전 총무·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김영주 목사

지난 주간은 10월 30일(「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출발점)이 있는 주간이었습니다. 한 주간을 지내면서 제 자신이 놀랐습니다. 무척 담담하게 한 주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작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보내면서 동분서주했고, 한국교회 역시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 여러 부분에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올해 종교 개혁 주일(501주년)에는 지난해와 달리 한국교회는 아무런 성찰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 듯 했습니다. 저 자신도 무덤덤하게 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약간은 시니컬하게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지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적합한 것 같습니다. 단 1년 동안에 나는 왜 이렇게 변했는가 하고 생각하니 당황스럽기조차 했습니다. '서있는 곳이 다르면 풍경이 다르다'는 말이 내게 해당되는 말인가? 그러나 딱히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지난 1년은 여타의 일 년과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촛불혁명이라고 불리는 촛불집회를 통한 시민들의 열망을 담고 새 정부가 성립되었습니다. 사회곳곳에서 적폐를 몰아내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자하는 바람이 큰 태풍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동안 기득권들이 관례와 관행과 관습으로 당연시 해왔던 일들이 '을'들의 도전에 의해 정죄되거나 물리쳐야 할 적폐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권위주의적 남성문화, 특권층들의 비리와 부패, 갑들의 고용비리, 재판관들의 부정과 부패, 금수저들의 오만과 독선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이렇게 문제가 많았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놀랄만한 일들이 매일 뉴스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한국사회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힘들더라도 세상을 바꾸고자하는 이런 노력들에 적극 참여하여야 할 것입니다. 혹자들처럼 "개혁 피곤증(?)"을 앞세워 그동안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동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가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오늘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세상을 새롭게 바꿔보려는 기운들이 분출되고 있는데, 교회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유달리 잠잠합니다. 한국교회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살펴보지 않고, 새로워지겠다는 노력도 물론 없이 잘못된 관습을 되풀이 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오히려 세상의 언론들이 그런 문제점들을 속속들이 고발하고 있는데도 교회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부 교회가 앞장서서 매주 토요일 광화문에서 진행되고 있는 태극기집회(?)는 차치하더라도 한국교회는 우리사회의 변화의 몸부림과 상관없이 그 기득권의 모습을 공고히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최근 광화문에서 열린 '한국교회의 회개기도 대성회'는 한국교회가 한국사회가 기독교를 보는 정서를 잘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단적인 예입니다. 저 자신도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괴롭습니다. 앞선 주일 김고광 목사님의 설교 '한국교회의 개혁은 목사부터'라는 말씀이 계속 마음에 남습니다. 개혁주간을 맞이한 우리는 먼저 가정과 회사와 교회와 일터에서 갑질(?)을 즐기지 않았는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고백이 우선되지 않는 개혁은 오히려 갈등과 분쟁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개혁교회가 그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언제나 개혁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말씀을 개혁이라는 관점으로 읽습니다.

(마가복음) 오늘 본문말씀은 한 율법학자의 "가장 소중한 계명이 무엇입니까?"하고 묻는 말에 예수님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내가 곧 죽을 것이고, 부활 할 것이다.' 라고 예고하신 후, 예루살렘 성전 입성, 무화과나무 저주, 성전 정화, 포도원 소작인 비유, 부활 논쟁, 세금 논쟁 등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은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당시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학자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고, 예수 죽음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의 으뜸 되는 계명에 대해 단순히 한 율법학자와의 문답식의 지식 교류로 보면 안 됩니다. 이 말씀 이후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강하게 질책하고 있습니다. 이는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말씀(유언)으로 읽어야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네 마음(감정)을 다하여 목숨(죽음)을 다하여, 네 뜻(옮음, 바름)을 다하여, 네 힘(능력)을 다하여 섬기라""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붙들고 묵상해야 합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에게 마음이 이끌리고 있으며, 죽기까지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내 능력을 다하고 있는지! 그리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정말 사랑하는가! 하고 물어야 할 것입니다.

(룻기) 오늘 본문의 룻을 보면, 여성 신학에서는 여성들의 아름다운 연대라고 하지만 그것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모압 땅에서 약 10년 동안 거주하면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각자의 집으로 보내고자 합니다. 아마 나오미로서는 여러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었을 것입니다. 아들들의 죽음으로 연결고리가 없어졌고, 모압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은 고향사람들이 모압 출신인 며느리를 어떻게 대할지 걱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한국사회가 남예멘사람을 비롯한 이주민을 대하는 태도를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역사에서 적대적 입장을 취하고 방해한 모압을 무척 싫어했습니다. 모압 사람들이 여호와의 회중에 오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모압 출신인 룻은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룻에게는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았다 해도 남편도 없는 상황에서 홀로된 시어머니를 모셔야 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또한 모압 사람들을 근원적으로 싫어하는 베들레헴 사람들의 냉대가 쉽게 예견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를 따라 나섭니다. "당신이 가는 곳에 나도 가겠습니다. 당신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룻은 나오미를 따르는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이해관계를 넘어선 결단입니다. 어쩌면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도 있는 길을 결단합니다. 룻은 헌신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옳은 결단이었습니다.

믿음은 선택이자 결단입니다. 신앙은 용기이기도 합니다. 어려움과 희생을 무릅쓰고 하는 결단이고 용기입니다. 룻기의 저자는 이 룻의 결단을 통해 여호와의 회중에 모압 사람들이 드는 것을 금하고 있는 이스라엘 중심의 신명기 법정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룻기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는 국제결혼을 한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여자를 내 쫓으라고 했던 에스라의 이스라엘 국수주의에 제동을 걸고 있습니다.

유대인을 위한 복음서라고 알려지고 있는 마태의 예수님 족보에 당당하게 그 이름을 올리고 있는 위대한 결단의 여인들이 있습니다. 다말, 라합, 밧세바 등 이런 사람들이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라 이스라엘 밖의 이방인들입니다. 이들의 희생적이고 올바른 결단은 룻과 함께 예수님이 이스라엘만의 주님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구세주가 되는 길을 열어놓은 열쇄가 되고 있습니다.

이 분들 모두 관습과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부정과 부패와 불의가 정당화 되는 이 세상, 남성중심주의, 기득권 중심주의에 맞선 여인들이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바른 결단, 헌신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불행히도 한국교회는 아직까지도 이스라엘 중심주의, 남성우월주의, 기득권 중심에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포용과 환대보다는 배제와 혐오를 신앙이라 고집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양과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로 스스로 제물이 되셨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성령을 힘입어 자기 몸을 제물로 삼으신 그 피로 죽은 행실에서 떠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재물로 바쳤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바른 삶을 살기위해서는 자기의 몸을 죽이기까지 헌신해야 하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자기를 죽이기까지 헌신하지 않고서는 참 신앙인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오늘의 한국교회는 개혁이 필요합니다. 개혁에는 헌신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결단과 헌신이 없이는 개혁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양의 피나 송아지의 피로 제사를 드릴 수 있다는 이스라엘의 제사법을 완전히 무효화 시킨 것입니다.

신앙은 자기를 죽이는 것이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은 추상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시인 안도현은 그의 시 '너에게 묻는다' 에서 길거리에 뒹굴고 있는 연탄재에서 헌신을 발견하고 '내가 정말 한번이라도 누구에게 뜨겁게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라고 묻고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헌신과 희생의 다른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뜨겁게 사랑했는가? 온갖 힘을 다하는 착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예수를 사랑했는가"

최근 갈등과 분쟁으로 둘로 나뉘어 있는 교회에 출석하는 권사님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권사님들도 분쟁으로 다투는 어느 한편에 속한 분인 듯합니다. 그분들은 본인들만이 진리의 편에 서 있다고 항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분쟁의 한 복판에 서 있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촛불을 들고 있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목사님은 언행일치의 신앙을 가진 분으로 매우 존경스러운 분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늘 기도하며 응답을 받고 있다.

저는 그 분들의 주장을 들으면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지만, 우리들의 대화가 논쟁으로 이어질까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남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은 아집과 고집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표출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분들에게는 열정도 믿음도 헌신도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에게는 '바름'이 없었습니다. 조금만 사태를 객관적으로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습니다. 광화문의 한 복판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그들의 확신과 헌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른' 복음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결단과 헌신과 함께 ' 바름, 올바름'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열정과 헌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바름'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무엇인지를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인 시편146편의 말씀은 하나님은 약한 자, 소경된 자, 비굴한 자, 고아와 과부 등을 돌보시는 분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은 기득권과 어울려서 교회의 세력을 확장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자리는 약자, 어려운 자, 주린 자, 소경, 비굴한 자, 고아, 과부 등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우리 교회는 「마틴 루터」가 개혁하고 싶었던 옛 부패했던 교회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토인비는 초대 수도원의 '거룩한 독서, 거룩한 노동, 거룩한 기도'운동이 근대 사회를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상한 운동이 「마틴 루터」에게는 그 시대의 적폐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수도원을 기득권의 논리를 뒷받침해주고 기득권에 의해서 각종 혜택을 누리는 타락한 종교집단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답기 위해 삼가 조심하며 그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늘 조심해야 합니다. 선줄로 아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자신을 끊임없이 갱신하고 개혁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자 뿌리 채 말라버렸던 것처럼 한국교회가 그렇게 될까 두렵습니다.

풍요로운 계절에 기독교의 절망을 이야기 한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지만, 오늘 예수의 말처럼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꼭 실천하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11월 4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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