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차 김교신 선생 기념학술대회
오른쪽은 사회를 맡은 청어람아카데미 양희송 실장, 왼쪽은 강연을 전한 전인수 KC 대학교 신학과 교수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김교신 선생 기념학술대회가 10일 이화여자대학교 대학교회 소예배실에서 ‘김교신과 그 시대의 인물들’이란 주제로 개최됐다.

먼저 전 국사편찬위원장이자 숙명여대 명예교수인 이만열 박사가 인사말을 전했다. 그는 “이번 자리는 김교신 선생보다 김교신과 교류했던 사람들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라며 학술대회의 성격을 밝혔다. 특히 그는 “특히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는 800페이지짜리 성서조선 7권 전집을 출간할 예정이라 더욱 뜻 깊다”며 소회를 밝혔다. 성서조선은 김교신 선생이 활동하던 당시 무교회주의사상을 적극 펼쳤던 기독교 잡지다. 이만열 박사는 “성서조선의 사료적 가치는 매우 뛰어나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덧붙였다.

제 4차 김교신 선생 기념학술대회 이만열 교수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겸 숙명여대 명예교수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이어서 김교신 선생의 넷째 딸인 김정옥 여사가 참석해 인사말을 전했다. 그도 또한 “성서 조선 연구집은 구하기 어려운 데, 홍성사를 통해 더욱 멋진 모습으로 출판될 것에 기대된다”며 “오늘 학술 대회는 1930-40년대 한국 기독교가 어떠했는지 발견하여, 김교신 사상이 다시금 우리 신앙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제 4차 김교신 선생 기념학술대회
김교신 선생의 넷째 딸인 김정옥 여사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곧바로 전인수 KC대학교 신학과 교수가 ‘김인서, 그리고 김교신과 벌인 논쟁’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강의 서두에서, 그는 “김교신은 무교회주의를 내세워 당시 조선의 조직교회에 대한 강한 비판을 가했으며, 김인서 교수는 당시 평양신학교와 조선장로교의 중심축으로, 김교신 선생의 무교회주의가 이단이라 생각해 비판을 가했다”고 당시 논쟁의 맥락을 전했다. 이어 그는 “김인서와 김교신 모두 조선교회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기에, 1930년의 논쟁은 격론으로 어어 졌다”고 강조했다. 즉 그는 “김교신은 조선교회가 성서적이기를 원해서 비판의 방식으로, 김인서는 연약한 조선교회이니 비판보다는 싸매고 가는 것이 우선”이라 밝히며, 그들의 조선교회 사랑 방법이 달랐음을 전했다.

우선 전인수 교수는 김교신을 비판했던 김인서 선생의 일생을 설명했다. 그는 “1894년에 태어난 김인서 선생은 1910년 처음 이동휘 목사의 ‘죄의 삯은 사망’이란 로마서 6:23 설교를 듣고 교회를 나갔으며, 이후 1919년 대규모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다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김인서 선생은 훗날 고문의 강도가 극심해, 신사참배 반대에 적극 나서지 못했다”며 그의 고백을 인용했다. 아울러 그는 “김인서 선생은 감옥 생활 중, 중생 체험을 해 적극 복음전도자로 살아가기로 회심했다”고 덧붙였다. 김인서의 저술에 나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청진 감옥에서 처음 정좌한지 수개월에 ‘너는 죄 없느냐?’는 엄중한 심문이 한 시간도 끊이지 아니한다. 홀연 ‘너도 죄인이라’는 무서운 선고가 양심에 들렸다...(중략)... 이 고민을 여러 날 계속하는 중 홀연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영음에 접하여 확연 예수께서 구속하여 주심을 믿었다...(중략)...이 때에 내가 출옥하면 복음전도에만 헌신하기로 하나님 앞에 약속하였다”

전인수 교수에 의하면, 감옥에서의 중생 체험 이후 김인서는 “내 청춘의 생명으로 사수하던 민족운동을 꺾어버리고, 일본 정권하에서라도 내 동포에게 복음 전하는 것으로 나의 독립운동을 삼겠다”고 술회한다. 민족주의가 중심축이었던 그의 삶이 돌연 복음전도 최우선주의로 전환된 것이다. 아울러 전인수 교수는 “김인서의 조선사랑은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었다”며 “구국운동으로서 기독교 민족주의가 국가·교회·하나님이라는 순서를 갖는다면, 김인서의 복음주의적 민족주의는 하나님·교회·국가의 순서를 갖는다”고 설명했다. 김인서의 삶이 민족주의적 복음주의자에서 복음주의적 민족주의자로 전환된 셈이다.

이어 그는 “김인서는 33살이던 1926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으며, 신학교 3학년이던 1930년에 「신학지남」이라는 평양신학교 기관지 편집을 돕게 됐다”며 “여기서 그는 김교신과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에 대해 논쟁을 했다”고 전했다.

여기서 그는 “김인서는 보수적 복음주의 신앙에서 조선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강조했다”며 “교회의 민족주의적 요소를 경계했고, 특히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들에게는 송곳 같은 비판을 꽂았다”고 설명했다. 그에게 있어 교회를 분열시키는 사상은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였다.

제 4차 김교신 선생 기념학술대회 전인수 KC신학대학 교수
전인수 KC 대학교 신학과 교수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또 전인수 교수는 “김인서가 제도적 조선교회에 대한 명확한 애정을 가지고 있던 만큼, 김교신과 그의 스승인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를 고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김인서는 무교회주의가 교회의 타락을 조직에 있다고 보는 생각이 바로 오류라고 지적했다”며 “그는 교회의 타락이 조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닌 사람에게 있기에, 조직 때문에 교회까지 부인할 수 는 없다”는 김인서의 생각을 설명했다. 하여, 그는 “김인서는 무교회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타락한다면, 무교회주의 자체도 타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덧붙였다.

나아가 그는 “무교회주의는 엘리트주의”라며 “다수의 문맹 하류층을 상대하는 일반 교회와 소수의 지식계급을 상대하는 무교회는 같을 수 없다”는 김인서의 논점을 밝혔다. 뿐만 아니라 전인수 교수의 말에 따르면, 당시 김인서는 “우치무라는 ‘조선영계를 탐탐웅시(耽耽雄視)하는 영적 제국주의의 야심’이다”라며 “기독교의 복음마저 일본화하려는 저의가 우치무라에게 있으며, 복음은 세계적이지만 우치무라 무교회주의는 철저히 일본적”이라고 비판을 가했다.

반면 김교신 또한 김인서를 비판으로 응수했다. 전인수 교수는 “김교신은 일본 유학 때 우치무라를 만남으로 조선인과 조선인을 사랑할 수 있는 시각과 방법을 배웠다”며 “그는 우치무라를 진정한 애국자라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또 그는 “김교신은 자신이 배운 무교회주의란 ‘교회 밖에 구원이 있다’이며, 이는 루터의 종교개혁과 더불어 바울의 교리와도 맞닿아 있는 것임을 주장했다”고 밝혔다. 특히 전인수 교수에 의하면, 김교신은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모든 신교(新敎) 교회가 구교(舊敎)로 퇴화할 때, 다시 한 번 교회 밖에 구원이 있음을 제창했다”며 무교회주의가 곧 루터의 종교개혁 연장선에 있음을 전했다.

하여, 전인수 교수는 “김인서가 민족주의적 논점으로 비판했을 때, 김교신은 우치무라의 애국심으로 응수했다”며 “나아가 김인서가 무교회주의를 일본적 기독교의 표상이라 말한 점에 대해서, 김교신은 무교회주의는 루터의 종교개혁과 맞닿은 개념이라 반박했다”고 전했다. 그는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는 제도적 교회를 절대시하는 것을 비판하는 사상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역설적으로, 김인서의 무교회주의 비판은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던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를 이슈화 시킨 계기가 됐다. 전인수 교수는 “김인서는 「신학지남」에서 김교신을 이슈화함으로 조선교회는 부정이든 긍정이든 간에, 김교신과 「성서조선」에 관심을 가졌다”며 “따라서 김교신의 주장은 탄력을 받게 됐다”고 설명했다.

곧바로 전인수 교수는 논쟁의 핵심을 꿰뚫어 설명했다. 종래 연구의 논점을 제시하며, 그는 “김인서가 우치무라와 김교신을 비판한 이유는, 조선을 식민지배한 일본인에게 복음을 들어도 되는가라는 민족적 논리가 깔려 있다”고 설명했다. 즉 그는 “김인서는 우치무라의 신앙과 사상이 일본적이라 봤다”며 “반면 김교신은 우치무라의 사상이 일본적 애국심이 깃들어 있어 조선의 영적 척추를 세울 수 있다고 봤다”고 소개했다. 민족주의 논리로 논쟁을 바라본다면 김인서와 김교신 둘 다 조선민족과 조선교회를 사랑했다는 점이 같기에, 사랑하는 방법에 있어 관점의 차이가 빚어낸 논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제 4차 김교신 선생 기념학술대회
전인수 KC 대학교 신학과 교수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하여, 그는 “김인서의 김교신에 대한 무교회주의 비판 이면에는 무교회주의가 반정통적이라는 불신이 깔려있다”고 그들의 논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설명했다. 특히 그는 “김인서는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성서관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가령 그는 “우치무라와 김교신은 성서가 성령의 영감으로 된 하나님 말씀이라는 데 의심은 없었다”며 “다만 우치무라는 성서가 인간의 책이며, 기록상의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 성서 무오설을 부정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무교회주의는 성서가 과학적 오류가 없다는 의미에서 말한 게 아닌, 하나님의 성격, 인간, 죄와 구원에 관해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무교회주의가 성서를 하나님 말씀이라 고수’하는 이유를 제시했다. 반면 그는 “김인서는 우치무라가 진화론을 인정하고 과학적 입장에서 성서를 보기 때문에 정통주의 성서관에 배치된다고 비판했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그는 “김인서는 훨씬 보수적 성서관을 지녔다”고 전했다.

때문에 그는 “김인서는 무교회주의는 교회를 파괴하는 잘못된 이단으로 생각했기에, 우치무라와 김교신을 문제 삼았다”고 전했다. 아울러 그는 “김인서는 우치무라가 조선의 기독교를 일본식 기독교로 바꾸려는 영적 제국주의의 의도를 숨기는 것 아닌가 염려했지만, 실은 그 또한 일본교회의 조선전도에 대해서 상당히 우호적 이었다”고 설명했다. 즉 그는 “당시 일본인의 조선전도에는 제국주의적 의도를 완전 배제하기는 힘들었다”고 지적했다.

예들 들어, 그는 “1921년 조선전도부가 폐지됐지만 일본조합교회의 조선전도에는 조선총독부의 동화정책에 대한 공공연한 협력을 표명했다”며 “그럼에도 그는 일본인이 전도한다 해도, 조선 땅에 복음이 전해지는 것 자체를 중시했다”고 밝혔다. 하여 그는 “김인서는 오직 복음전도가 삶의 중심축이었으며, 복음전도를 기반으로 모든 현안을 판단하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결론지어, 그는 “김인서는 자신이 정통으로 생각하는 기독교를 일본인이 전했을 때 영적 제국주의라고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곧 김인서가 우치무라와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를 민족주의 논리로 비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김인서가 우치무라와 김교신을 비판한 것은 무교회주의는 기독교가 일본화 되면서 기독교의 정통성에서 이탈했다는 의미”라며 김인서의 ‘일본적’이라는 뉘앙스를 풀어 설명했다.

끝으로 그는 “김인서는 우치무라의 교회론이 문제가 있어, 그의 복음전도를 문제시 삼았다”며 “무교회주의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민족주의로부터 조선교회를 지키는 것을 자신의 사명이라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이점을 확실히 해야 논쟁의 실체가 선명해 진다”며 강연을 마무리 했다.

제 4차 김교신 선생 기념학술대회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독교 종합일간지 '기독일보 구독신청 바로가기'